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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테미르 발라고프, <빈폴>

[퀴네필 스타터 팩 02]

by 수환 Mar 24. 2025
칸테미르 발라고프 Kantemir Balagov, <빈폴(Beanpole)>


  <빈폴(Beanpole)>은 2019년작으로, 한국에서는 2020년 초에 개봉했다. 코로나가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한 겨울에 만난 영화는, 보는 이를 황폐한 레닌그라드 한 가운데에 데려다 놓았다. 마치 다가올 세상을 과거를 통해 예견하듯이.

  칸테미르 발라고프(Кантемир Артурович Балагов)는 1991년생의 젊은 감독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Closeness(가까이)>(2017)를 봤던 나는 <빈폴>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감독이 은퇴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할리우드에서의 차기작 <Butterfly Jam>의 제작에 진척이 있는 듯하다. 정말 다행이다.) <Closeness>는 MUBI에서 감상했었는데(지금도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90년대 후반 작은 유대계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는 강렬하고 굉장한 작품이었다. 그랬던 감독이 퀴어 영화를 연출한다고 하니 기대가 될 수 밖에.

  종전 직후 레닌그라드는 스산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 도시에는 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고 세 살 난 아이 파슈카를 키우며 팍팍하게 살아가는 '이야'라는 젊은 여성이 있다. 그녀는 극의 제목이 가리키는 키다리(Дылда), 바로 주인공이다. 키가 아주 크고, 머리칼과 속눈썹까지 창백한 이야는, 한 때 군인으로 복무했으나 부상을 입어 제대했다. 종종 몸이 굳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후유증 때문에 그녀의 작은 집에는 죽음이 찾아든다.

  그리고 마샤가 돌아온다. 전쟁이 끝났으니까. 그녀는 옛 전우 이야에게 자신이 맡긴 파슈카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부상으로 불임이 된 마샤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의지할 대상으로 아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마샤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은 마음과 죄책감이 뒤섞인 이야. 주변 사람들과 환경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든, 어떻게 변해가든 한 가지는 명확하다. 두 사람은 함께 살며 같이 아이를 키울 앞날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실현이 요원할지라도.

  전쟁은 끝났지만 어떤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빈폴>은 2019년 칸 영화제에서 퀴어 종려상 부문 후보에 올랐었다. 발라고프 감독은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저)>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재하는 과거를 배경으로 퀴어 캐릭터를 그려 미시사적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영화 <너와 나>(2023, 조현철 감독)가 떠오르기도 한다.

  각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전쟁 이후의 삶을 재건하고 꾸려나가는 영화. 그리고 반 LGBT 기조가 강한 정부가 있는 러시아에서 나온, 소비에트 연방 시절 여성 퀴어의 욕망을 드러내는 영화. 이를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연출이 정말 좋고, 두 주인공 배우의 연기 합이 훌륭하며, 화면 또한 굉장히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세련된 유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이렇게나 처절한 분투가 삶인 사람들이 있다.  

  극장 개봉작이었고 OTT에도 있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작품이지만(검색해보니 한국어 리뷰도 많다), 더 많이 이야기되길 바란다. 겨울이 완전히 가기 전 감상을 추천한다.



+ 감독의 전작도 한국 OTT에서 편하게 찾아 보고 싶다...

++ <버터플라이 잼(Butterfly Jam)>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자본의 힘에 끌려가지 말고 감독의 개성을 잘 살려서 나와주길. 한동안 돌았던 은퇴 소문은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인으로서의 여러 고충 때문이었겠거니 싶다(고 멋대로 생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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