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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10. 2024

[워홀] 돈은 자유다

소신 있는 삶을 위한 작은 발걸음

무작정 호주 워홀을 떠나다


 그렇게 군대를 마치고 나서 학교에 돌아왔다. 이젠 수험공부 같은 거를 그만두기로 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할 때는 정말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놀 때 놀려면 공부할 때 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때 처음으로 전 과목 A+을 받아 전액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등록금 안 내는 대신 인도여행을 좀 보내달라고 했고, 그때 인도를 1달 동안 다녀와서 여행에 대한 열망은 더더욱 커졌다.


 그때 해외 경험을 하고 싶었지만 반수를 하면서 학점을 하도 망쳤기 때문에 과 수석을 했어도 교환학생으로 선발될 만한 학점이 모자랐다. 그때 주변에 워홀을 가는 친구들이 왕왕 있었고, 호주에 가면 시간당 2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의 친척 중 한 명이 조부모님의 노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부모님 돈을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굉장히 심했다. 그래서 돈을 벌면서 해외에서 살아볼 수 있는 워홀을 가기로 했다.


 가고자 하는 길이 망했다면 그냥 다른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교환학생을 못 가서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솔직히 걱정도 많았지만 그냥 무작정 호주에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어른이 되다


 대학교 때는 용돈을 한 달에 30만 원 정도 받았고 군대에 가서는 일병월급이 5만 원 정도, 병장월급이 8만 원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명색이 직업이 군인인데 휴가를 나오면 부모님께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법적으로 성인이기는 했으나 25살까지도 내가 스스로 벌어서 나를 부양하지 못했다. 


 호주 워홀은 현실이었다. 주마다 렌트비가 150불씩 밀려왔고,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다. 처음에 호주에서는 영어도 잘 못하고 무경력자니까 청소도 하고 접시도 닦으면서 정말 꾸역꾸역 적응해 나갔다. 어떤 식당에서 7시간 동안 한 번도 못 쉬고 접시를 닦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한국사람들이랑 안 좋은 근무조건에서 청소도 하다가 결국 Burgmann College라는 호주국립대학교의 기숙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근무조건도 좋고 사람들도 너무 좋았다.


 내가 처음으로 나를 벌어서 부양하면서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주급을 받으면 월세고 생활비고 나가는 게 상당히 많아서 실제로 내 통장에 남는 돈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끼고 아끼면서 생활했다. 내 마음속에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작은 자부심이 싹트고 있었다.


 문득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 누나와 내가 태어나고 와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출이 매일 같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래도 남는 돈을 모아 집도 사고 여행을 보내주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일을 해내셨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이란 직접 굴러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부딪히고 깨져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가끔 한국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은 게 한국에서 평범한 정도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이면 호주에서는 근면하다고 칭찬을 받는다. 매니저들이 그만둘 때 네가 아는 한국사람을 데려오라고 할 정도였다. 나도 근면정신(나쁘게 말하면 노예근성)이 있었는지 대학교 기숙사에서 낮에는 청소를 하고, 캔버라에서 꽤 잘 나가는 호텔에서는 하우스맨(온갖 잡다한 일을 다한다.)을 하면서 주급이 1,000불을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쯤이면 한 달에 거의 3,000불씩 저축을 했다.


 그때 호주사람들의 소신(?) 같은 것들을 좀 배우게 되었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자란 나로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갑자기 빠지거나 이런 것들을 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호주 사람들은 아닌 건 아니고, 못하는 건 못하는 거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나도 통장에 잔고가 좀 쌓이고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열심히 하되 소신 있게 할 말은 하자라는 마인드가 좀 생겼고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다. 원래는 대충 5,000불 정도 모아서 여행을 다니고 그때는 중국에 가서 중국어를 좀 공부할까 생각을 했었다. 호주 워홀비자가 만료될 때쯤에 내 통장에는 25,000불 정도가 있었다. 체 게바라를 생각하며 쿠바를 가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 솔직히 그게 나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모은 돈을 보니 충분히 쿠바에 가고도 돈이 남을 거라는 계산이 들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상이 현실에 가까워짐을 경험하던 나날들이었다. 청소기를 돌리며 내년 이맘때쯤엔 쿠바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스르다


 호주를 떠나기 전에 부모님과 누나가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러 오셨다. 가족들과 1년 만에 만나서 너무 재미있고 행복했으며 내가 좋아했던 장소들을 같이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호주에서 고생하면서 스스로 자립했던 생활들을 이야기했으며, 어쨌든 손을 벌리지 않으니 자식으로서 역할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의 이틀이 남은 어느 밤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한국에 와서 이제 취업을 준비해야지?"

 나는 대답했다. "아빠 저는 쿠바에 갈 거예요. 남미도 가볼 거예요. 군대에서 항상 꿈꿨던 목표였고, 그날들을 위해 열심히 돈도 모았고 준비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나의 취업이 많이 걱정되셨는지 빨리 한국에 돌아와 취업준비를 하는 게 어떤지 물어보셨다.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내가 꿈꿔왔던 여행을 할 거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부모님도 나를 응원해 주셨지만 그때만 해도 나를 이해하진 못하셨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던 부모님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부모님이 반대하는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경제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돈이 많아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는 달리 내가 원하는 이상에 도달할 만한 현실적인 금전 수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26살의 나에게 소신 있는 삶을 살게 해 준 작은 발걸음은 바로 돈이었다.


혼자 룰루랄라하며 일하던 오밤중의 라운드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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