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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순 Mar 16. 2024

만약 여행에서 비가 온다면

비야 반갑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지난 여행이 떠오른다.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가족,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도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설레는 여행에 재미를 더해주는 건 예상할 수 없는 오락가락한 날씨다!


20대 초반, 미술 학원에서 급속도로 친해진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나는 낮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준비생이었고, 동갑에 비슷한 처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는 곧 단짝이 되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매일 수다를 떠는 게 낙이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지겨워질 때쯤 우리는 주말여행을 계획했다. 여행지는 둘 다 가 본 적 없는 전주였다.

여행 당일. 출발하려는 기차 안에서 친구는 애타게 나를 기다렸다. 뒤늦게 기차에 올라탄 나는 겨우 친구와 만났다. 친구의 놀란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즐거운 여행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전주에 도착했고, 전주 한옥마을에서 길거리 음식을 하나하나 맛봐가며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걸었다. 추억을 남기겠다며 사진도 마음껏 찍었다. 


그리고 저녁. 숙소를 찾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도저히 안 되겠어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갔다. 저렴한 우산들은 이미 다 팔렸고 남은 건 비싼 장우산뿐이었다. 우리는 우산 대신 일회용 비닐 우비를 하나씩 구매했다. 여행자에게 비싼 장우산은 사치일 뿐 아니라 걸리적거리는 방해요소였다. 

천둥이 치던 그날, 거센 빗줄기에 얇은 우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었다. 찢어질 듯 나풀거리는 우비를 보며 우리는 에라 모르겠다! 마음으로 바꿨다. 

얇은 우비를 입고 빗속을 뛰어다니던 그 밤을 상상해보라. 흠뻑 젖은 서로를 보고 깔깔대면서 낯선 동네를 활보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웅덩이만 찾아서 폴짝 뛰어다녔다. 비가 내리는 밤을 오롯이 만끽했다. 친구와 나는 숙소에 들어와서도 밤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낭만 있는 여행이었다. 


두 번째 기억도 비가 오는 여행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돈이 없던 우리는 서울에서 지하철로 갈 수 있는 인천으로 향했다. 한참을 지하철에 있다가  인천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신기한 구경거리와 맛있는 냄새에 홀린 듯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먹고 공갈빵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송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딱히 계획을 짜오지 않아 즉석에서 정한 루트였다.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모른 채 우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송도에 도착해 구경을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보쌈집을 들어갔다. 대표메뉴라는 마늘보쌈을 시켰고,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양에 남은 음식을 포장해 나왔다. 


수다를 떨며 한 시간쯤 걷다 보니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은 곧 무서운 장대비로 변했다. 이대로 걷는건 무리였다.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콜라 두 캔과 우산 하나를 사서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비가 내리는 걸 보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보쌈 봉지를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식사. 콜라와 식은 보쌈을 먹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었다. 아늑한 식당에서 먹은 갓 나온 보쌈보다도 맛있었다. 허겁지겁 고기를 주워 먹는 서로의 꼴이 웃겨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국 우리의 첫 여행은 비와 함께 마무리 되었다. 


대체로 나의 여행은 비와 함께다. 여행에서 비가 내리면 계획한 일정이 어그러지고 하루를 버리기도 한다는데, 어째서인지 이 두 여행은 내게 커다란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그렇다고 여행 갈 때마다 비를 기다리는 건 아니다. 그저 비가 내려도 어련히 그에 맞는 추억이 생기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큰맘 먹고 떠난 여행에서 비가 내린다고 실망하지 말자. 나처럼 두고두고 추억할 '비와 함께한 여행' 이란 여행 폴더가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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