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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elyn H Feb 20. 2024

오피스 빌런_불공정한 심판관

유감입니다만, 퇴치나 박멸은 어렵겠습니다. 

다들 직장에서 한번쯤은 불쾌한 경험이 있지 않나요?


단정할 순 없지만 그러한 경험은 주로 꽤 '특이한' 사람과의 부딪힘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에서 비롯된 경험은 무엇이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 믿는 편이기에, 궁극적으로 나쁜 경험이란 별로 없지 않을까 하는 다소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희소하지만(그래서 더욱 인상적이겠지만) '나쁜' 경험으로 기억에 남은 것들은 공정하지 못한 것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라는 억압적 상황을 마주했을 때였습니다. 


엄정한 기준과 근거 없이 휘둘러진 '권력'은 상대에게 곧 '폭력'으로 치환됩니다. 

의도했든 아니면 상황상 불가피했든, 폭력을 권력으로 착각한 사람은 여지없이 '오피스 빌런'이 됩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시겠습니다만, 아직 (다행히)겪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참고하세요. 우리는 필요하면, 싸워야 하니까요.   


연말 성과 평가는 지난 1년간 조직 생활을 얼마나 잘 했는지에 대한 바로미터이자, 성적표입니다.

사계절을 하루같이, 하루를 사계절같이 열심히 달려왔다면 결과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지요. 

당연히 인센티브와 연봉, 승진에까지 직결되니까요.


수년 전 연말. 저는 그해 열두달을 쉼없이 조직의 목표에 집중했고 다행히 그에 상응하는 분명한 성과를 내었습니다. 거의 모든 지표가 초과달성이라는. 

성과 평가는 두 차례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당시 부서장이었던 저는 1, 2차 평가자가 동일했어요.  

그런데, 소위 '정치' 싸움에서 밀린 제 상사가 최종 평가 직전 부득이 퇴임하게 되었습니다. 목표 달성에 조직 관리나 인품에도 별 문제없던 분이 하루 아침에 방을 비운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그보다 평가권자가 낯선 분으로 바뀌면서, 전임자의 평가를 갑자기 뒤집었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지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워 인사팀에 문의를 했지만, 그 누구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지는 못했어요.  


고민 끝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저에 대한 평가가 곧 함께 고생한 팀 전체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누군지,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 따위는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부당한 선례의 피해 당사자가 되는 것이 끔찍히 싫었고, 공정치 못한 누군가의 행태를 반드시 짚어야 한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저녁. 

인사팀 중재로 회의실에 마주앉은 그는 궁색하고 요상한 변명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목표 달성은 했지만, 조직 전체가 어려우니 고통 분담 차원에서 다들 저평가를 감수했다 혹은 당신은 그래도 나쁜 축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었지요. 말의 의미를 최대한 명확히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정말 어려웠습니다. 솔직히 몹시 지루했고, 그렇게나 징그럽게 후진 대화는 얼른 끝내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만 슬슬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한 저는 단 두 개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 질문에 납득한만한 답변을 하거나, 전혀 생각지 못한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면 쿨하게 인정하리라고 마음 먹고요. (아니라면, 끝까지 가겠다는 다짐도 함께)


Q1. (평가권자의 자격 요건) 당신은 나와 내가 맡은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A1. 묵묵부답.

그는 우리가 한 일의 세부 사항과 각 평가 지표의 의미는 물론 저의 일하는 방식과 역량에 대해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팀의 온전한 1년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평가를 어떻게 할까요. 


Q2. (절차적 정당성) 전임자의 평가를 조정하면서, 당사자인 나와 사전 커뮤니케이션을 거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A2. 또한 묵묵부답.

당시 조직은 HR시스템 상 평가권자가 최종 평가에 앞서, 대상자와의 면담을 통해 평가 결과 및 그에 대한 의견을 논의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거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납득하지 못한 대상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고요.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내린 '날치기 평가'였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왜 불공정한 심판관이 되어, 저에게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조직 내에서 돌던 여러 소문과 상황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팀에 대한 자의적 평가는 중립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못난 편견에 불과한 것이었어요. 무엇보다 제대로 대화할 준비조차 안된 사람이 평가권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니, 한편으론 씁쓸했습니다. 저에게 그는 불공정한 심판관을 넘어, 성의조차 없는 예의없는 보스였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저의 고과는 원래대로 제 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다행이지요. 

소심한 저는 그 일을 겪으며, 때로 (옳다면) 본능이 시키는대로 과감해져도 괜찮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작은 용기랄까요. 

'이 조직은 원래 그래, 아무리해도 바뀌지 않아...'와 같은 태도가 당장 마음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부당한) 영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본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불공정과 불합리를 체념하면, 빌어먹을 저 빌런들에게 계속 먹이를 던져주고 몸집을 키워주는 꼴이 됩니다. 사사건건 정의를 부르짖는 투사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커리어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결정적 순간에는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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