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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담 Feb 04. 2024

04. 누군가에게 집을 보여준다는 것

네이버에 집을 검색하면 이런 뜻이 뜬다.


1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      

2  사람이나 동물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의 수효를 세는 단위.

3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


그 중 세 번째,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집안으로 나는 줄곧 집을 정의내려 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내가 몸 담고 있는 건물 그 이상으로, 집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흔히들 아파트를 살 때는 대단지, 브랜드, 학군, 평수 등을 따져봐야 한다고 한다. 브랜드에도 자이와 힐스테이트를 포함한 선호 브랜드들이 1번부터 끝번까지 등수 매겨지듯 쫙 정렬되는데, 내가 살았던 집은 당연히 구매 조건으로 볼 때 가치가 낮은 아파트에 속했다.


지금이야 다 형편에 맞게 사는 거겠거니, 담담하게 바라볼 줄도 알게 됐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친구들 집에 놀러갈 때면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용(?)에 괜히 주눅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예쁘게 도색된 아파트 건물 뿐만 아니라 복도식이었던 우리 집과 달리 계단식으로 지어진 새 아파트들은 한 층에 두어 세대만 산다는 사실도 내겐 꽤나 충격적이었다.


하루는 고등학생 때, 기숙사에서 같이 살던 친구의 집에 셋이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던 내가 봤을 때 그 친구 집은 공간을 낭비한다고 싶을 정도로 넓어보였다.


거실이 이렇게 넓다고?

근데 아무 용도로도 안 쓴다고?

집에 이렇게 예쁜 그림을 걸어놓고, 이렇게 깨끗하게 해놓고 산다고?


거실 하나에 방 하나였던 우리 집은 인테리어는커녕 집을 단정하게 꾸미는 것도 사치였기에, 넓고 예쁜 친구 집에서 그런 감상이 더욱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럼 그냥 조용히 있었으면 될 텐데, 괜히 머쓱한 마음에 나는 입으로 감탄을 내질렀다.


이야, 너희 집 진-짜 넓다.

이 그림은 뭐야? 너무 예쁘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아보니 내 나름 부럽고 위축되는 마음을 숨기고자 부러 그렇게 과장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른 친구 A가 그랬다.


희담이 너는 감탄하려고 감탄하는 사람 같다, 야.


그 말에 왠지 내 좁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그 친구는 오바스러운 내 모습에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집'이라는 공간 자체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내게 그 말은 유독 아프게 들렸고 나는 입을 꾹 닫았다.








그렇다고 어릴 적 집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친구를 부르지 않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중학교 때는 집에 친한 친구를 불러와 같이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컴퓨터로 만화를 함께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무 거리낌도 없었다. 그 친구가 우리 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된 적도 없었다.


그건 어렸고 무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다 크고 나서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과 경제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된 지금은 그때 느끼지 못했던 수치심을 일시불로 갚듯 더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는 누가 집까지 선뜻 태워준다고 해도 아파트 이름을 대기가 주저스럽고,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줄 때면 집값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된 요즘 세상의 편리함이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자취방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남자친구에게도 본가가 어디인지 말한 적 없고, 데려다줄까 물어볼 때면 한사코 거절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는 직장 동료 분이 집까지 태워다주시면서 본인 집은 무슨 무슨 아파트다, 라고 말씀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구나, 듣고 있었는데 그 분이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는 그렇게 좋은 집이 필요한지 모르겠더라고요. 이 정도가 나한테 맞아요.


연차도 많으신데 왜 여기 사실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라도 했을까봐 덧붙이셨을까. 괜히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이 정도'라 함은 어떤 정도를 의미했던 걸까. 집값, 평수, 입지? 그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던 이유는, 나한테는 그 집도 우리 가족이 들어가 살면 참 좋겠다 싶은 꿈의 집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집이 누군가에게는 '이만 하면 나쁘지는 않은' 집이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해명하지 않고, 의미부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깨끗한 마음이라야 가능한 걸까.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까지 부끄러워지는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런 고민을 했었다.

그런 마음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대학생 때 붙어다녔던 친구들 중 한 명인 J는 피부가 안 좋았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았는데, 본인 피셜 너무 심한 악건성이라 맞는 화장품도 찾기 힘들다고 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서 점심 시간이면 집에 들러 다시 세수를 하고 크림을 바르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친구와 1교시 수업을 듣는데 친구가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왔다. 피부가 또 뒤집어졌던 모양이다. 맨앞에 앉은 그 친구를 보고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자네는 왜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나?


실내에서 꽁꽁 싸매고 있는 모습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느끼셨던 걸까.

친구가 대답했다.


아, 교수님. 제가 피부가 너무 안 좋아서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보기에 불편하시면 벗을까요?


그 말을 하는 친구는 자네, 오늘 점심 뭐 먹을 건가? 하는 물음에 아, 교수님. 제육볶음 먹을 겁니다. 라고 대답하기라도 하듯 명랑한 목소리였다. 당황은 오히려 교수님께서 하신 듯했다.


아니, 그럼 괜찮네. 계속 쓰고 있게.


그때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부족한 점이라 여겨지는 부분에 있어서도 한치 부끄러워 하지 않던 그 친구의 태도가 내게 큰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수치'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가진 어느 것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낮잡아 볼 수 없다. 내가 그 부분을 담백하게 인정해버리는 순간 겸연쩍어지는 것은 그걸 흠이라 여기려 했던 주변 사람들이다. 나는 낮아지지 않는다.


나도 아직 어릴 적부터 집에 대한 수치심을 가슴 한켠에 가지고 있다. 멋있고 좋은 집을 보면 감히 내가 가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보다도,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누군가의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머무를 생각도 없기에.


지금 우리 가족을 만들어준, 내가 거쳐온 작고 소중한 집들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늑한 나의 집을 갖고, 아늑한 부모님 집을 마련해갈 것이다.

누가 뭐라하든 그 공간에 사는 우리가 만족해하는 곳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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