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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알던 나를 다시 꺼내준 그림 챌린지의 기록

by 단새

호기롭게 자취를 시작하고 의욕 만만이기만 할 것 같던 시절, 나는 오히려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도,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도 희미해졌다.
이전에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빠져들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마치 오래된 환상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랬던 적이 있긴 했나?’ 싶었다.


그런 시기에 우연히, 아니 어떻게 보면 애써 붙잡은 기회가 있었다.
서바이벌 드로잉 챌린지. 줄여서 서바챌이라고 불렸다.
그림을 세 장씩, 하루도 빠짐없이 30일간 그려내야 하는 챌린지였다.


인스타툰을 그리시는 오문님이 주최를 하신 챌린지였는데,

실패하면 본인조차 강퇴라는 살벌한 룰을 가진 1기를 성황리에 끝내고 2기도 모집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두 번째로 열린 서바챌 공지를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입금을 했다.
그때의 나에겐 그림 실력이 절박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인스타툰을 그린다고 해도 이 정도 '고오급' 인체드로잉 실력까지는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첫 번째 모집 글을 새벽에 보고도 흘려보냈던 나에게 두 번째로 나타난 서바챌 모집글을 보고 있자니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작정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는 또 없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어 입금부터 하고 봤던 것 같다.




챌린지는 진짜 말 그대로 서바이벌 그자체였다.

커리큘럼대로 인체 도형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하루에 세 장을 그리고 새벽 네 시까지 노션에 인증해야 했다.
기한을 넘기면 탈락. 그림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우선 ‘3장을 그렸는가 아닌가’가 중요했다.


처음 며칠은 무작정 따라 그리기에 급급했다.
자료를 펼쳐놓고, 이 선이 왜 이런 모양인지도 모르고 따라 그렸다.


그런데 17일째 되는 날, 1일 차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려보는 복습 과제가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내 손끝이 달라져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림도 달라졌다. 분명 같은 자료를 보고 그리는데도!

이상하게도,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저 도형은 그렇게 나뉘는지, 인체의 어느 부분을 단순화한 것인지,
그 선이 어딘가 이상한 이유는 뼈대부터가 어긋났기 때문이라는 사실까지.
여전히 잘 그린다고 할 순 없었지만,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는게 확 자각되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지금까지 이걸 하고 있었구나.’


사실 그 전까지는 ‘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잘하고 있는 건 더 모르겠는’ 날들이었다.
매일 그림을 그리고도 찜찜한 기분이 남았고
이게 의미 있는 일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그날의 그림에 틀린 점을 일일이 적었다.


도형을 나누는 방식이 이상하면 왜 이상한지 적고
똑같이 따라 그렸는데도 어색하면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누구보다 집요하게, 거의 고쳐지지 않는 선 앞에서
왜, 왜, 왜, 하고 이유를 붙잡았다.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서바챌에 참여한 사람은 많았고 과제도 같았지만

각자 그걸 대하는 방식은 다 달랐다.

단톡방에서 오가는 이야기나 피드백을 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하던 게, 어쩌면 조금 독특한 특성일 수도 있겠구나.’


남들이 힘들어하는 방식이 내겐 당연했고,
나는 내가 뭘 몰랐는지 파악하는 데에 더 오래 머물렀다.
그게 나의 방식이었고, 그걸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 시간이었다.




챌린지 막바지 즈음, 서바이벌 챌린지에 스태프로 참여하신 수무님께서

인스타툰 연출 강의를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이전에 프로크리에이트 챌린지를 기획했던 이야기를 나눴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커피챗을 하자고 하셨고,
며칠 뒤엔 “스태프로 도와주시고 강의도 들어보시겠어요?”라는 제안을 받았다.


안 할 이유가 없지! 당연히 승낙했다.


강의는 작게, 조용하게 진행됐다.
연재를 막 시작한 분, 이제 막 해보려는 분, 이미 꾸준히 해오신 분.
세 명의 수강생과 수무님, 그리고 나.

디스코드와 zoom으로 진행되어 밀도 있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수무님 강의의 장점 중 하나는 실제로 원고를 그려가면 피드백을 주셨다는 점인데,

차례차례 돌아가며 받았던 피드백은 생각보다 깊었고
그 시간 이후로 내가 그리는 만화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무래도 그럴수밖에.

그림 자체의 퀄리티와 표현의 퀄리티를 올리는 것들을 배웠고, 그 시너지가 났다고 할까?


서바챌에서 선을 쌓으며 익힌 관찰력,
연출 강의에서 얻은 컷 구성과 감정 흐름에 대한 감각이 겹쳐지며
내 그림엔 전보다 ‘생각의 흐름’이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업그레이드된 인스타툰이라는 결과물 이외에도, 마치 커리큘럼마냥 연결된 두 챌린지처럼

뭐라도 해보려고 참여한 챌린지가 확장된 기회까지 주다니,

심지어 그 확장된 기회가 과거에 내가 했던 시도(프로크리에이트 챌린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참 신기하고도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 모든 경험 후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건,
‘나는 여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안도였다.


한동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예민하게 고민만 하다 흐릿하게 흘려보내면서 '어쩌면 나란 사람은 원래 이런게 아니었을까?'

무기력함이 체화되어 있었다.


'나 옛날엔 안 이랬는데...' 싶어도 그걸 벗어나거나, 증빙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 떠오르지 않는 상태.
몰입이라는 말조차 버거운 나날들.


그런데 환경이 갖춰지고, 분명한 목표가 생기자 예전의 내가 다시 나오는 걸 느꼈다.

잘 그린 그림보다도 매일 이어진 선들과 그 선들에 매달린 나 자신이 더 선명했다.

특히 눈에 보이는 증거들이 있으니까, 보이는 힘이 되는 느낌이라 하나.


몰입이라는 단어조차 버겁다 느껴졌는데, 어느새 나는 다시 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각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단지 꺼내 줄 환경과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러나 저러나,
‘내가 기억하던 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그게 이 일련의 챌린지들이 내게 남긴 가장 확실한 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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