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은 어렵고, 퇴사는 더 어렵다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음에도
이 자리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일까 하는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출근은 익숙해졌고, 슬슬 감각이 돌아오는지 논문 하나 쓰고 나니 일에 탄력도 붙는 느낌이지만
앞으로도 같은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얼마 전, 전임자분이 휴직을 연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뭐 대단한 걸 한 것도 없는데, 1년이라니.
이러나저러나 전임자의 휴직 연장이 결정되면서 내 일정은 자연스레 가을까지 이어지도록 짜여졌다.
형식상 연장 의사를 묻긴 했지만, 이미 내 이름은 새 업무 플랜에 올라 있었다.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무언가 달라진 것도 없는데, 오히려 몇달 할일이 정해졌는데 왠지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채용공고들을 둘러봤다. 플렉스웍, 원티드, 인크루트 가리지 않고 보다가
계약직으로 나온 ‘콘텐츠 마케터’ 포지션을 봤다.
똑같은 계약직이라서 여기 있으나 거기 가나...싶어져 바로 껐는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래 뭐 재밌어보이니까 도전이나 해보는거지. 밑져봐야 현상유지지.
근데 지원하려니 없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막상 만들려고 보니, 도무지 쓸 게 없었다.
내 이력서에는 ‘연구원’이라는 타이틀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게 없었기때문에
이전에 써둔 이력서에는 결국 연구경력밖엔 쓰인게 없었다.
근데 또 웃긴게 한며칠 고민하며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조금씩 나온다.
강의 기획, 챌린지 운영, 툴 강좌, 일정표 서비스, 그림 프로젝트들. 공백기간에 했던 그 모든것.
연결 고리를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내가 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건 다 공백기 동안 벌였던 일들이었다.
당연하지만 뭔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큰 그림같은건 없었으니까.
주변의 실행력 좋은 사람들을 보며 나도 무작정 뛰어들었던 일들,
결과보다는 과정이 우선이었던 시도들.
그 중 일부는 끝까지 해보기도 했고, 일부는 도중에 그만뒀지만,
그 시기에 중구난방으로 벌였던 경험들이 이렇게 나를 도와줄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냥 ‘하고 싶어서’ 혹은 ‘불안해서’ 해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모든 시도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언제 시작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작은 일들이 어느새 내 이력의 한 줄이 되었더라.
결과가 어찌되든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게 참 신기했다.
요즘의 나는 여전히 저녁이면 힘이 빠진다.
퇴근 후엔 유튜브를 켜둔채 게임 좀 하고, 잠들고. 그렇게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하고 싶은 게 없는 건 아닌데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그런 스스로가 답답했을 텐데, 그래도 지금은 조금 덜하다.
가끔은 ‘그냥 그런 시기’라고 인정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매년 말에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올해도 아무것도 안 했네.”
하지만 이번엔 그 말에 살짝 덧붙이고 싶다.
“그래도, 계속 살아내긴 했잖아.”
완성된 답은 없고, 방향도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나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걸 하며, 내 삶을 살아왔다.
지금도 그렇게 살아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