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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은 어렵고, 퇴사는 더 어렵다.

불안하고 감사하고, 계속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지금은 하고 있는 일

by 단새

출근은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유예 상태였다.

입사 전엔 ‘연구행정 및 보조’라는 공고 문구를 보고 정해진 행정 업무만 하면 되는 자리일 거라 생각했다.

퇴근 후엔 내 할 일을 하면서 취준도 병행하겠다는 느슨한 계획도 있었고.


하지만 막상 첫 출근 날 받았던 건 관련 논문 두 부.

두 시간동안 논문을 읽는데 필요한 도메인 배경지식과 어떻게 개발까지 연결해 나갈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또 그렇게까지 낯선 건 아니었다. 석사 때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석사 때와 비교하자면 더 여유 있고, 구체적인 방향이 주어졌다. 사무실 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출퇴근은 멀었지만 널찍한 개인 자리가 있었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간섭이 없었다.

정수기랑 냉장고, 적당한 온도, 자리를 나누는 파티션.


다들 개인실을 쓰시는 구조라 특별히 마주칠 일도 없고, 평소엔 조용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서 좋긴 했지만, 그래서 더 정신을 차리고 알아서 움직여야 하는 구조였다.

내 할 일과 마감을 내가 정하고, 스스로 바짝 정신차려 집중해야만 하는 환경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단점만큼 장점도 큰 것이었다.


무엇보다 감사했던 건, 내가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전제가 나를 직장인보다 학생인가 싶게 만들기도 했다.

오래 남을 거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연구직 커리어를 쌓는다고 가정하고 관련 피드백도 세세하게 주셨고, ‘성과 잘 쌓아가라’며 방향도 잡아주셨다.

면접 일정이 있으면 이해해주셨고, 내부 공고가 뜨면 슬쩍 알려주시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곧장 몰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이 업계를 오래 하고 싶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면 연구원으로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이건 대학원 때부터 줄곧 느껴왔던 감정인데,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늘 가장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논문을 읽다가 막히고, 구현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내가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고 있나?’ 싶어졌다.


뭐랄까, 모든 사회초년생이 3년차가 될 때 까진 1인분을 못한다고도 한다. 세상 쉬운걸 나혼자만 바보같이 못하고있는 것 같고, 난 여기 안 맞나? 하는 전문성을 쌓아가는 괴로운 과정은 꼭 견뎌야 한다고도 한다.


근데, 변명해보자면, 석사 포함 3년쯤 되어가면 맛보기는 충분히 한 거 아닐까?


물론 문제는 내가 지금 하는 일보다 딱히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루한 연구 이력을 걷어내고 나면 남은 능력이 없다 해야하나...순수 개발도 자신 있게 말할 수준이 못된다.

또, 한참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선 주니어로서의 가능성도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AI가 주니어를 대체한다는 말도, 점점 현실처럼 느껴졌고.


그러다 보면 다시 이력서를 열어보게 된다. 거기엔 여전히 연구밖에 없다.

내가 해온 일 중 가장 정형화된 커리어는 이거고, 누군가에게 설명 없이 바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결국 이거다. 내가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걸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속 이걸 하는 느낌.

당연히 이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모르시는 팀에서는 나를 열심히 키우려 하고,

나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자꾸 멀리 보고 있다. 그래서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어색하다.


퇴근하고 내 걸 하겠다는 계획은 첫 몇 주 만에 무너졌다.

물론 핑계다. 피곤하고 귀찮고, 결국은 내가 집중을 못 하는 탓이다.


그래도 연구 특성상 그 피로가 퇴근 후까지 자꾸 따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무심하게 흘러가고 나는 그 안에서 감사함과 죄송스러움, 불안함과 체념 같은 걸 구분 없이 섞인 채로 가지고 다닌다.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으며 좋은 환경에서 출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비하면 충분히 감사한 일이지만, 이게 내가 오래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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