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지만 현실적인 이야기
밝힌 전적이 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3년 전 석사를 졸업했다.
그리고 디펜스에 참여하셨던 타 연구실 교수님으로부터 박사 제안을 받았었다.
그 랩실은 내 석사 연구 분야와 다른 곳이었지만 논문 성과는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고민 끝에 나는 가지 않기로 했다.
연구라는 세계에 끝까지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게 내가 잘하는 일이라는 확신도, 앞으로 계속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도 없었다.
사실 그 무렵엔 자존감이 꽤 바닥을 기고 있었다. 연구를 해보겠다고 덤벼든 나라는 인간은
똑똑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그 세계에서 너무 평범했고, 개발 실력도 애매했고, 논문 쓰는 건 더더욱 버거웠다.
애초에 대학원은 팔자에 없으리라 생각하며 살다가
정말 ‘어쩌디 보니’ 들어가게 된 대학원에 뜻을 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가도 싶다.
어떻게든 끝마친 게 장하다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겨우 끝내놓고 나니 '이 일을 계속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다른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더 컸다.
내가 가진 것 중 뭐가 평균 이상이고 뭐가 좋아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던 시기였다.
그래서 조금씩, 이것저것을 경험해봐야겠다 싶었던 것 같다.
부트캠프를 듣고, 그림을 그리고, 강의를 하고, 여행 일정을 팔았다.
툰도 그리고, 이것저것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면서 소소하게 돈을 벌기도 했다.
하루하루 뭔가 하긴 했는데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애매한 것 투성이였다.
무엇 하나 '경력'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짧거나 너무 비정형적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딱히 결과물이 뚜렷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어필하기에 그럴싸한 성과가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꽤 흘렀고,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때 나는 새로운 집에서 무기력한 여름을 보내고 있었고, 생활비는 점점 줄어가고 있었다.
막막했지만 당장 아무 아르바이트나 하긴 싫었다.
결국 취준이 목표라면 괜히 아르바이트에 체력이 분산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구직활동지원금부터 신청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친구가 받은 적 있던 지원금이라 대략 정보를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상담도 정기적으로 받아야 했고 정해진 교육도 몇 개 들어야 했다.
지원을 증빙하는 서류도 매달 제출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류를 여러 번 다시 보내기도 했고 상담자분이 이전 기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상담자분은 비교적 성의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이력도 있으시고 금방 취업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해주기도 하셨고.
하지만 그보다 내게 더 의미 있었던 건 그 시간이 나에게 일종의 루틴을 만들어줬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와 내 구직 일정을 공유하고, 한 달에 한 번이지만 밖에 나가고, 어떤 책임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
아무 구속도 없던 백수 생활에 일정이 생겼다는 자체만으로도 꽤 의미있지 않았나 싶다.
거기서 알선해 준 기업이 잡플래닛 평이 너무 안좋아 친구한테 징징대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가 공고 하나를 보내줬다.
“너 연구 경력 있으니까 이거 한 번 지원해봐.”
클릭한 링크에는 연구 계약직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출퇴근이 편하진 않았지만 급여는 무난했다. 그 이상 고민하지 않고 지원서를 냈다.
‘어디든 가야지’ 하는 생각이 제일 앞섰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합격 통보를 받았다.
출근 첫날, 내가 받은 건 출근용 명찰도 아니고 담당 부서 소개도 아니었다.
관련 논문 파일 몇 개, 연구 흐름 설명, 그리고 정리된 코드들.
공고에는 ‘연구행정 및 보조’라고 쓰여 있었지만 실제로는 보조보다는 연구에 가까운 업무였던 것이다.
정해진 그날의 업무만 끝내면 퇴근 후 내 일을 하면서 취준도 병행할 수 있으리라는
그나마의 계획은, 첫 주에 이미 무너졌다.
석사 시절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뭐랄까.
2년의 공백 끝에 막상 취업을 하게 된 마음은 후련하지 않았다.
계약직이라 결국 취준이 끝나지 않아서일까? 그리 생각했는데
결국 다시 이 경력을 꺼내들었구나 싶은 마음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길을 간다더니 결국 제일 익숙한 길로 되돌아온 것 같기도 했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선택했다는 생각에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렇다고 후회는 아니다.
지금도 그 선택이 정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만큼이 최선이었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내고 있는 일상이 그때 상상했던 모습과는 제법 다르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