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고재비 Dec 30. 2023

무대에서 빛나던 나를 기억해

연극배우를 꿈꾸던 찬란했던 나의 10대


다른 여자 아이들과 같은 식으로는 살지 않기로 결심했어.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다른 부인들처럼 살지도 않을 거야

난 너무 멋있게 태어났거든. 그러니까 이런 위기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거야.

내겐 아직도 겉으로 보이지 않은 좋은 점들이 많아.

난 젊고, 강하고, 커다란 모험 속에서 살고 있어. 하루 종일 불평만 투덜대면서 살 수는 없지.

난 좋은 운을 타고났어. 난 성격도 좋지. 명랑하고 힘도 세.

매일매일 나는 내면에서 성장하고 있는 걸 느껴. 해방의 순간이 가까워 오고 있잖아?

자연은 아름답고 인간은 착하고, 그런데 왜 내가 절망 속에 빠져 있어야만 하지?

 - ‘안나 프랑크의 일기’ 중에서 안나 -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그래서 관객에게 인물의 심리상태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독백이 좋았다. 상대 배우와 대화의 합을 맞추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내 안의 감정을 한 번에 쏟아내는 독백이 좋았다. 혼자 긴 대사를 외워 내뱉으며 내가 그 역할에 빠져드는 그 순간이 정말 짜릿했다. ‘연극부 날애 독백짱.’ 사실 그 당시에는 독백 대사를 마친 후 내게 건네던 사람들의 칭찬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연극부 시절, 나름대로 큰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새로운 도전이었다. 연극부가 되어 처음으로 준비했던 신입생 환영회 공연에서는 무대 뒤에서 소품을 챙기고, 조명이 꺼진 틈에 올라가 깜깜한 무대에 소품을 놓아두는 역할을 맡았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들의 박수갈채 소리에 나는 비록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서지 못했지만, 무대 뒤에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뭔지 모를 울컥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다가온 축제 공연, 2학년 선배들은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고, 1학년 후배들은 대부분 조명이나 소품, 음향 등 스태프를 맡아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 1학년이던 나에게 무려 두 줄의 대사가 있는 단역이 주어졌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작품에서 교장 선생님. 주인공인 키팅선생님과 대립 구도를 갖는 역할이었다. 내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뿌듯함이 컸다. 짧은 대사였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무대 위 동선도 어색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움직임을 궁리했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연극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이 함께 무대로 올라가 커튼콜을 했다. 무대 위 우리를 바라보는 관객들을 보며 90도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 이게 연극이구나.’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축제 공연, ‘탑과 그림자’라는 정신병동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묶은 작품을 공연했다. 나는 ‘꼽추할멈’ 역할을 맡았다. 곱사등에 공주병을 가진 할머니 역할. 캐릭터가 분명해 마음에 들었다. 허리를 숙이고 바가지를 등에 넣어 곱사등을 표현하고, 하얀 밀가루로 분장해 할머니 역할을 해냈다. 나의 대사와 움직임에 관객들이 웃고 울고 박수치던 그 순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후 ‘경남 고등학교 연극제’에 출전하여 여러 학교 연극부와 함께 학교 소강당이 아닌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해보기도 했다. 나는 점점 연극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고, 꼭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입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엄마와 많이 다퉜다. 나는 연극영화과로 진학을 하고 싶었고, 엄마는 현실성 없는 내 꿈이 맘에 들지 않으셨다. 사실 나도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런데 마침 연극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고등학생을 위한 연극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극부를 함께 하던 친구와 나는 “이거다! 우리 이거 들으러 가자!”며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그 연극 수업은 누구나 듣고 싶다고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서 필기시험을 치고, 실기 오디션까지 봐서 합격한 인재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다.

  어쨌든 그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는 경비가 필요했다.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을 설득해서 야간 자율학습 대신 아르바이트를 했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주문을 받아서 30만 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서울에 오디션을 보러 갔다.

  역시 서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은 다들 재능이 넘쳐 보였고, 인물도 출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초라해졌다. 필기시험도, 실기시험도 어떻게 치고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험 결과는 불합격. 함께 갔던 내 친구는 합격해서 여름 방학 동안 한예종에서 하는 연극 수업을 들었다. 부러움과 절망감이 나를 뒤덮었다.

  그 오디션이 내게는 엄마와의 내기였다. 오디션에 합격하면 연극영화과 진학을 고려해 보신다던 엄마는 불합격 소식이 기쁘셨을 테지. 나는 아무 반항도, 더 이상의 노력도 하지 않고 엄마가 원하는 소위 시집 잘 간다는 유아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엄마와의 내기에서 졌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후회스러운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도전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했던 과거이다. 지금도 나는 가정에서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 또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며 '하고재비'라는 별명을 가지고 여러 분야에 도전하고 즐기고 있다. 연극에는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속 나의 여전한 꿈은 연극배우다. 찬란했던 10대, 무대 위에서 빛나던 내 모습이 그립고 그립다.

이전 04화 드럼초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