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분위기를 망치는 인간이 있다.
"나 안 해!"
"나 안 가!"
"나 안 먹어!"
그러고 나서는 꼭 덧붙인다.
"난 괜찮아. 진짜 괜찮으니까 나 신경 쓰지 마..."
저 문장에는 '나 지금 짜증 났으니까 이유도 알아맞히고 마음까지 달래 볼래?'가 숨어 있다. 한참 흥이 오른 분위기에 와장창 얼음물을 퍼붓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 달래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엄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자주 먼 길을 나섰다. 시내버스도 한 시간에 한 대 다니는 경기 변두리에 살았어도, 주머니에 차비가 있으면 충청도든, 강원도든, 경상도든 꼬불꼬불 찾아가고는 했다. 서해 대교가 개통되기 전 충남 태안의 외가에 가려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8시간, 10시간이 걸려야 태안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털털 거리며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 번도 빠짐없이 웩웩 구토를 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너무 화가 나서 나한테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버스 기사님께서 휴지와 봉투를 가져와 직접 치워주셨다고 했다.
나는 길을 나서기 전부터 거기는 왜 가냐, 가서 뭐 하냐, 가기 싫다고 툴툴거렸다. 엄마가 멀미약을 사서 입에 대주면 거부하다가 억지로 넘기자마자 그 자리에서 토해내고는 했다. 버스에서는 언제 도착하냐고 8시간 내내 물었다. 엄마의 대답은 늘 같았다. "다 왔어."
험한 여정 끝에 도착해 집안 어른들이 우루루 나와 반갑게 맞으면, 나는 뚱한 표정으로 엄마 뒤에 숨었다. 콩밥에 시골 나물, 생굴과 생김, 김치와 무를 지져서 끓인 찌개 등이 가득한 밥상에서 나는 먹을 게 없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계란 프라이와 간간한 조미김이 먹고 싶다면서 말이다. 후식으로 내온 사과와 배 말고 딸기맛 아이차나 새우깡이 더 먹고 싶었다.
혈기 가득한 시골 외삼촌은 앵앵 울며 요지부동인 나를 버려둔 채 동생만 데리고 경운기를 몰고 가버렸다. 서울 사촌언니는 놀이터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그냥 가버렸다. 경상도 구미에 있는 엄마 친구네 집에 가서도 나랑 놀고 싶어 하는 그 집 아이를 등지고, 동화 전집만 읽었다. 떠나기 전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는 어른의 손을 끝내 뿌리치고 심통이 난 채 돌아섰다. 9살 때였을까, 이웃집 식구들과 공원에 나간 날, 나는 또 뭔가에 단단히 마음이 상해서 길 한 복판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빠가 얼른 가자고 손을 잡아끌어도 나는 완강히 버티었다. 나를 놓고 떠나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와앙 울음을 터트리며 바지에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나는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나를 반기지 않는 마음도 금방 알아챘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장소가 늘 버거웠던 아이, 울음 밖에는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던 아이, 그래서 모두가 하하 호호 웃을 때 분위기를 망치던 아이. 그런 내가 나도 불편했다.
엄마,
두 아이를 데리고 대구에 다녀왔어.
기다란 왕집게 장난감을 들고 나선 둘째는
버스에서도 혼나고 기차에서도 눈치를 봤지.
초코 도넛을 사주지 않는다고 발을 구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뛰어서 간신히 기차에 올랐어.
엄마, 심심해
엄마, 언제 도착해
엄마, 배고파 목말라
아이들 투정을 받아내며 도착한 역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손을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녀석들 때문에
나는 머쓱한 웃음을 지었어.
커피 한 잔 마시러 들어선 카페에서
첫째는 갑자기 집에 가겠다며 울고
둘째는 그럼 나도 누나 따라간다 하고
그런 아이들 손에 초콜릿을 쥐어 주며
난처하게 서 있는 아이 이모를 향해
괜찮다고, 아무 일 아니라고 얼버무렸어.
엄마,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이들이 아무리 못나도 괜찮았는데
밖에서 미운 아이가 되는 건 정말 싫더라고.
의젓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모두가 예뻐하기를 바라게 되더라고.
대구에서 돌아와 집에 누우니 둘째가 그래.
"엄마, 대구 이모는 장미를 닮았어.
여기 이불에 그려진 장미 같아."
이렇게 예쁜 말을 하는 아이가
밖에서 좀 눈총을 받은 게 뭐가 대수일까.
아들, 이모가 정말 행복해할 거야.
너의 서투른 날들을 추억할 수 있는
근사한 여행이었어. 다음에 또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