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고 나서 제일 어려운 게 '말을 삼키는 일'이다.
식구들 누구라도 내 눈에 띄면, 반드시 할 말이 생긴다. 나는 음성 기능을 장착한 CCTV 같다.
"일어 나라, 밥 먹어라, 밥 먹을 때 돌아다니지 마라, 다 먹은 거 싱크대로 갖고 와라, 어어? 반찬 묻은 손으로 벽 만지지 마라!, 커튼에 매달리지 마라, 텔레비전 볼 때는 뒤로 가라, 게임 영상은 보지 마라, 집에서 공 튀기지 마라, 공 던지지도 마라, 양치해라, 꼼꼼히 해라, 가서 입 헹궈라......"
이런 식의 당부와 주의와 명령은 식구들이 내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아니, 어느 때는 보지 않고도 소리친다. 침대에 누워 잠깐 핸드폰을 보면서도 내 귀는 거실을 향해 열려 있다.
"텔레비전 볼륨 낮춰! 먹을 거 갖고 싸우지 마! 아이스크림 다 먹었으면 당장 냉장고에 넣어!!"
나도 쿨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의 자기주도역량을 키워주는 교양 있는 엄마 노릇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세상의 규칙과 질서가 너무 많았다. 어른인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이들에게는 아니었다. 엄마의 총알 같은 잔소리가 없으면 씻지도 않고, 치우지도 않고, 제 때 일어나거나 잠들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런 생활 습관 외에 수학이나 한글 같은 공부라도 시키려고 들면 나와 아이들의 사이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작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크지 않았다. 엄마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대체로 눈빛과 침묵으로 나를 제압(?)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거 말고 다른 거 먹고 싶다며 반찬 투정을 하면 엄마는 대꾸를 않고 혼자 식사를 했다. 시험을 잘 보겠다 호언장담을 하고 성적이 나오는 날 대성통곡을 하는 나를 울음이 그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성인이랍시고 밤 12시, 1시가 넘어 들어오는데 내가 무사히 귀가한 것을 보면 엄마는 곧장 잠이 들었다.
한 번은 내가 인생의 거대한 구렁텅이에 빠질 뻔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만난 은사님을 각별히 존경하고 따랐는데, 졸업 후에도 계속 연락을 하고 지냈다. 아이가 없는 선생님에게 내가 딸노릇 한다며 아버지, 아버지 했고 대학 입학 후 방황하는 마음을 긴 편지에 담아 이메일도 자주 보냈다. 그러면 선생님은 철학과 예술과 본인의 경험까지 담아 젊은이의 마음을 위로하는 답장을 주시고는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 먼저 연락이 왔다. 밥을 사주시겠다는 거였다. 나는 신이 나서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어린 제자에게 변함없이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다. 나를 아끼기에,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미룰 것도 없이 당장에 선생님을 따라나섰는데...
그곳은 선불폰 휴대전화 다단계 업체였다. 생명의 물도 함께 팔았다.
처음에는 다단계인 줄 모르고 큰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명강의를 들었다. 자신의 꿈, 이루고 싶은 소망,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공유했다. 다단계에 대한 세상의 편견 때문에 인생 역전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주옥같은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기고, 나는 당장에라도 선생님의 동업자가 되리라 결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이 건물을 나서면, 가족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오늘의 일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는데, 섣불리 발설했다가는 사람들의 무지한 반대에 부딪칠 거라 했다. 그러니 내가 사업을 제대로 시작하기 전까지는 엄마를 비롯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선생님은 우리 엄마도 잘 알고 있으셨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나의 담임교사였고, 나를 딸처럼 신경 써 주셔서 엄마는 선생님께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뜨겁게 뛰었다. 나는 앞으로 세계 방방 곡곡을 누빌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었다. 흥분으로 집에 들어섰고, 엄마는 벌겋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고 물었다.
"어딜 다녀왔어?"
나는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당부가 있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방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자꾸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알면 얼마나 놀랄까? 얼마나 좋아할까? 결국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가 엄마를 향했다.
"엄마, 놀라지 마. 나 오늘 선생님이랑 OO동에 다녀왔어. 거기서 엄청 좋은 일이 있었어."
그곳은 이미 지역에서 소문난 다단계 업체 본사였고, 엄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 거기 다단계 회사 아니야?"
"뭐야, 괜히 말했네. 거기 그냥 다단계 아니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데 아니라구!!"
나는 씩씩대며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가 반대를 할 게 뻔해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는 완전히 눈이 뒤집혔고, 꼭 악신 들린 사람 같았다.
엄마는 내 상태를 보더니 갑자기 모자를 쓰고 점퍼를 걸치며 집밖으로 나섰다. 나랑 싸우지도 않고, 나를 설득하지도 않고, 나의 악다구니를 뒤로 한 채 집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침묵 속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엄마의 차가운 침묵을 뒤집어쓴 채 제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상대가 없으니, 홀로 나의 하루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만나러 달려갔고, 즐겁게 식사를 했고, 어떤 건물에 들어갔고, 갑자기 사업 설명회를 들었고, 은행장이나 교장이다 하는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고, 내가 해보고 싶은 일 10가지를 적었다. 그곳을 나올 때, 나는 열병 걸린 사람처럼 정신을 놓고 말았다.
'욕망이구나!'
나는 고요한 집안 한 복판에서, 내가 욕망의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믿고 존경하던 스승은 더 이상 없었다.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사랑하던 그분 안에 무시무시한 욕망의 괴물이 살고 있었다는 걸 알아 버렸다. 그리고 내 안에도 완전한 자유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철없는 욕심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단 2시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사기였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엄마는 그렇게 나를 구했다.
엄마,
흥분해서 날뛰는 나를 두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던 엄마의 뒷모습을 기억해.
덫에 걸린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
그날 나는 엄마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나와 말도 섞지 않고 나가는 엄마를 보며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
자식의 어리석음을 지켜보는 게
부모의 숙명인 걸까?
부모가 아는 것을 자식은 모르고
모르는 주제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 하니
가시밭길을 걸어갈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엄마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을 거야.
어린 자식이 상처받지 않기를
그 무서운 함정에서 나오기를
나를 옭아맨 그물을 찢고 나오게 된 것은
엄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