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구합니다>
OO대학교 합격
중등 고등 지도 가능
번호: 016 - 000- 0000
대학 입학을 앞두고 나는 엄마와 함께 동네를 돌면서 전봇대에 과외 전단지를 붙였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입학금과 등록금은 마련했지만, 통학을 하려면 생활비가 필요했다. 학교는 집에서 편도 2시간 거리였고 경기도 거주자라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3월부터 학교에 다니려면 돈을 구해야 했다. 지금처럼 업체를 통해 과외를 구하던 시절이 아니라, 직접 발품을 팔았다. 혼자 전단지를 붙일 용기가 없었고, 동네에서 누가 아는 척을 할까 봐 괜히 눈치가 보였었다.
목표로 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합격했다. 입시 실패에 대한 절망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근처 아파트에 사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첫 학생이었다. 주 2회 찾아가서 수학을 가르쳐주고 20만 원을 받았다. 그 돈이면 왕복 교통비와 식비를 빠듯하게나마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3월 첫 전공 수업이 아침 8시에 시작이라 나는 집에서 새벽 5시 40분에 출발했다. 아침 일찍이라 막히지 않아서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7시 30분 정도였다. 나는 텅 빈 강의실에 도착한 첫 번째 학생이었다. 한참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와 달리 학생들은 수업 시작 5분 전이 되어서야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떠들썩하게 북적이는 대형 강의실에서, 나는 아무 감흥 없이 자리를 지켰다. 고등학교 때와 똑같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얼굴을 익힌 몇몇이 모여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교문에서 제일 가까운 종로김밥에서 참치 김밥과 라볶이를 주문했다.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 줄이 1천 원인데, 여기 참치 김밥이 2500원이었다. 만약 여기에서 점심을 자꾸 먹게 된다면, 나는 이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무 살의 우리들은 어색하지 않으려고 자꾸 더 말을 많이 했다. 그렇게 애쓰다가 오후 수업까지 다 듣고 집에 왔는데, 5시가 채 되지 않았다. 밖이 너무 환해서, 나는 서러웠다.
뭘 하지?
입시를 치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대학만 가면 뭐든 다 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꿈을 꾸었는데, 막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활의 무게는 여전했고, 넓은 세상 한 복판으로 나가 보니 나는 작고 초라했다. 드라마와 소설에 기대어 산 게 문제였을까. 내가 만난 스무 살의 세상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밋밋한 현실이었다. 그것은 내게 큰 배신감을 안겼다. 내 인생에 반전 같은 것은 없고, 이렇게 고단한 삶이 이어진다면 뭐 하러 기를 쓰고 살아야 하는 거지?
방황의 시작이었다. 지독한 공허, 였다.
나는 더 이상 새벽에 길을 나서지 않았다. 나 대신 출석 체크를 해 줄 친구들 정도는 사귀었다. 학교에 가고 싶으면 가고 귀찮으면 안 갔다. 어느 때는 이틀, 삼일 내내 방 밖을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불속에 몸을 눕히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내가 맡은 과외는 늘어났다. 한 번 시작하니 소개가 이어졌고, 과외가 나의 본업이 되었다.
엄마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태껏 착하게, 꿋꿋하게 잘 지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나도 알고 싶었다. 왜 이렇게 무기력한 지, 또 왜 이렇게 분노가 치미는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나도 이런 나를 집어던지고 거리의 반짝거리는 소녀들처럼 그렇게 되고 싶었다.
"엄마, 나 학교 그만 다닐래."
대학에서 2학년까지 마치고, 나는 기어이 그 말을 꺼냈다. 더 이상 학교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 2년 동안 제대로 학교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무 미련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달콤한 주술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만이 중요했다.
엄마는 자퇴를 하겠다는 딸을 설득하지 못했다. 대신 급하게 내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한걸음에 달려왔고, 나는 친구 앞에서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친구는 나약한 나의 마음을 다독이며 쉬고 싶다면 얼마든지 쉬라고 했다. 하지만 쉬는 방법이 꼭 자퇴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휴학을 하는 게 좋겠다고 나를 달랬다. 1년쯤은 네 마음대로 살아 보라면서.
휴학을 했다.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옷을 사고 귀걸이도 사고 여행도 갈 작정이었다. 어쩌면 유럽 여행도 갈 수 있을지 몰랐다. 나는 자유였다.
그리고 엄마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3기였다.
생존율은 30퍼센트였다.
엄마,
학교를 그만두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날 보며
착한 딸인데, 착한 딸인데, 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가 너무 슬펐어.
늘 강하고 단단한 모습만 보여주던 엄마가
그날은 내 앞에서 무너지더라고.
왜 우리는 이렇게 맨날 힘들어야 해?
왜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해?
왜 우리는 꿈 따위가 있어서 절망해야 하는 거야?
막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했어.
이미 엄마도 나도 충분히 울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새벽에 화장실로 달려가
온몸을 쏟아내는 토악질을 하는데
나는 내 고통에 갇혀 그 소리도 못 들었나 봐.
엄마가 위암 3기라고 했을 때
이건 정말 너무한다 싶었어.
고생만 죽어라 하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이
덜컥 암에 걸려 죽는다?
대체 얼마나 더 엄마를 괴롭혀야
신의 시험이 끝나는 것인지
우리는 편해질 자격이 없는 건지
하늘을 향한 원망이 깊었지.
엄마,
나는 이제 그 시절의 공허로부터 벗어나
엄마가 보듬고 지켜낸 딸인 나 자신을
소중하게 아끼며 살아가고 있어.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은
엄마를 향해 소리 지르던 내가 너무 미워서,
어리석었던 그때의 내가 미워서 그런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