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참 안 닮았네요."
동생과 함께 외출하면 자주 듣는 말이다. 마흔이 넘어 이제는 둘 다 중년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저런 반응을 경험하고는 한다. 저 문장이 단지 '차이가 있다'를 의미한다면, 나의 속이 그렇게 쓰리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얼굴에서 동생 얼굴로 옮겨가는 눈동자의 동공이 확장된다. 그리고나서 내뱉는 말은 기어이 나를 건드리고 만다.
"동생이 참 잘생겼네."
내가 말귀를 알아먹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식의 외모 비교를 겪어 왔다. 대단한 논리적 사고를 하지 않아도 '둘이 안 닮음 - 동생이 잘생김' 다음에 예측되는 사실은 너무 뻔하다. '누나는.... 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말의 논리가 그렇다는 거다.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어지려면 부모의 고슴도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는 세상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지 들으면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판단한다. 엄마가 나한테 예쁘다고 하는 말을 몇 살까지나 믿을까? 물론 나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도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착하다', '똑똑하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에 목말라했다.
'착하다'와 '똑똑하다'는 내게 너무 버거운 말이다. 착하고 똑똑하려면 얼마나 애를 쓰게 되는지 모른다. 나쁜 마음을 먹거나 나쁜 말을 뱉으면 남이 뭐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를 질책하게 된다. 착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똑똑한 내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실망을 넘어 절망한다. 이렇게 나는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늘 몸부림쳐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동생이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게 참 미웠다. 자기가 애쓰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거저 얻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고추 달고 나왔다며 반기는 것도 싫고, 시골 외숙모가 동생을 꼭 끌어안고 자는 것도 싫고, 동생이 무슨 사고를 쳐도 씨익 웃으면 넘어가지는 너그러운 상황도 싫었다. 동생이 너무 쉽게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남매는 안 닮았다. 외모, 취향, 입맛, 특기가 전부 다르다. 그러나 말하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약한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을 품고, 사람에 대해 헌신적이고 성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공통점은 옷차림이나 외모처럼 한눈에 드러나는 게 아니다.
너무 오랜 세월 '남'에 의해 비교당하고 주눅 들었다. 정작 그렇게 무례했던 '타인'이 아닌 죄 없는 '동생'이 내 미움의 타깃이 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과 말이 나를 끌어내렸지만, 그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지독한 열등감의 구덩이에서 탈출하는 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지금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동생 인물이 좋다고요? 감사해요. 제 핏줄이랍니다. 흐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