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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꼭 혼났으면 좋겠어

by 난화 Mar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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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동생이 바지에 쉬 묻혔어!"

"엄마, 동생이 손으로 반찬 집어 먹어!"

"엄마, 동생이 숙제 안 해!"

"엄마, 동생이 누구랑 싸웠어!"

.......


나는 우리 집안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사였다. 나라는 용사의 특이점이라면, 동생의 불법과 불의를 감찰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있는 죄는 반드시 처벌하고, 없는 죄도 만들어 처벌하는, 동생 감사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었다. 양치나 세수는 까먹어도, 동생을 고발하는 일만큼은 잊지 않고 해냈다.


그놈(?)은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거슬리는 일 투성이었다. 엄마가 떡볶이를 내오면 미친 속도로 나타나 얼굴을 박고 몇 없는 오뎅을 싹 건져 먹었다. 뒤늦게 내가 떡 한 번에 오뎅 한 번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안 했다. 눈은 또 밝아서 신기하고 매력적인 놀잇감을 잘 찾아냈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서 녹슨 톱칼을 찾아내어 자랑을 할 때는 얼마나 속이 쓰리던지... 결국 슬슬 얼러서 내 걸로 만들기는 했지만, 톱칼을 얻고 간쓸개 다 내어준 나의 자존심은 만신창이였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오뎅을 독식한 죄! 신상 놀잇감을 누나에게 상납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자랑까지 죄! 동생의 죄목은 이런 식으로 무한 생성되었다.


평소 원수 같은 남매 사이라도 한마음으로 뭉칠 때가 있다. 바로 엄마 몰래 나쁜 짓을 꾸밀 때이다. 9살이 된 동생은 금단의 문에 들어서고 말았다. 바로 '보글보글'과 '스트리트파이터'가 지배하는 오락실이었다. 한 판에 50 원하는 그 어두컴컴한 환락의 세계에 발을 딛고 만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연탄 떼는 사글셋방을 얻어 어렵게 지냈고, 동전 하나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엄마의 한 달 월급이 30만 원이던 시절, 동생은 대범하게 엄마 지갑에서 시퍼런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감췄다. 돈을 꺼낼 때는 섬찟하리만큼 무서웠겠지만, 이내 극복하고 탕진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50원짜리 마른 쥐포, 쫀득이 등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었다. 오락실은 주머니 두둑한 동생과 조무래기들 덕에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이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 동생이 갑자기 황홀한 군것질거리를 입에 달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나는 집요하게 추궁했고, 동생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 나를 공범으로 포섭했다. 나에게 얼마를 나누어주면서 모른 척해달라는 거였다. 나는 동생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이 돈의 출처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나는 정의의 사도가 아닌 달콤한 간식이 먹고 싶은 아이였을 뿐이었다. 완전 범죄가 될 거라 믿은 철부지였다.


엄마가 어찌 자식의 비행을 모를 수 있을까. 엄마는 우리 둘을 무릎 꿇고 앉혔다. 손에는 파리채가 들려 있었다. 파리채는 엉덩이, 발바닥, 손바닥을 자유롭게 격할 수 있는 간악한 물건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서늘한 추궁 앞에 나는 벌벌 떨었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는 의젓한 누나여야 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나한테 돈을 줬지만, 나는 무슨 돈인지 몰랐어. 진짜야."


나는 동생 관리를 잘 못했다며 손바닥 다섯 대를 맞았고, 동생은 도둑질과 거짓말이라는 죄로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 나는 항상 동생이 혼나길 바랐는데......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나 혼자 살겠다고 동생을 사지에 버리고 도망친 깊은 죄책감과 수치심이 어린 나를 괴롭혔다.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동생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동생은 그 시절을 흘려보내고 의젓하게 성장했다. 명절이나 일가친척들이 북적북적 모인 자리에서, 동생은 옛일을 안주거리 삼아 꺼내고는 한다. 누나가 예전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알아? 실실 웃으며 나를 놀리는 동생 앞에서 나는 여전히 얼굴이 붉어진다. 동생은 잊었는데, 괜찮아졌는데, 나는 아직 그때의 내가 얄밉고 그 시절의 동생이 가여워 태연할 수가 없다.


동생이 꼭 혼나길 바랐던 나는 이제 그의 행복을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나의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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