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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은 텔레파시가 통해

by 난화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지는 것 vs 처음부터 가난한 것

화려한 스타로 살다 잊히는 것 vs 처음부터 무명인 것


어느 쪽이 더 불행하다고 느낄까?


나에게 동생의 등장은 한참 이쁨 받고 잘 나가던 두 돌 인생에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세상의 전부인 엄마를 쪼개 가져야 하는 비극이 시작되었고, 심지어 나의 지분이 더 적었다. 아직 아기인 나에게 엄마는 더 작은 아기를 돌봐야 한다며 등을 돌렸다. 내가 쿨룩 헛기침 소리만 내어도 무슨 일인가 달려오던 엄마는 이제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고개를 돌린 채 아가에게 젖을 물렸다.


엄마의 따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꼬마 스타는 인기의 절정에서 한순간에 몰락했다. 엄마 품이 전부였는데, 그 품을 빼앗기고 나자 아이의 마음은 한없이 가난해졌다. 자신의 전부를 빼앗은 녀석을 어떻게 가만 둘 수 있는가. 분한 마음에 누워 있는 아기를 꼬집다가 궁둥짝을 맞고 서럽게 울었다. 모든 게 동생 때문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첫째인 나의 설움을 가여워했다. 자꾸 퉁을 놓는 어린 나를 품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동생이 우리 가족이 된 지 1년, 2년, 3년... 시간이 제법 흘렀어도 나의 마음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그냥 누워만 있던 동생이 웃고, 걷고, 뛰고, 입을 열어 앙증맞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였던 나와 달리 동생은 순하고 무던했다. 누구라도 그 애 얼굴을 보면 무장해제가 되는 듯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비뚤어진 못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 살 터울의 우리 남매는 치열하게 싸우며 컸다. 동생이 작을 때는 서로 치고받고 주먹다짐을 했다. 그 뒤에 덩치가 커진 다음에는 막말과 기싸움이 이어졌다. 들어와도 싸우고, 나가도 싸우고, 먹다가도 싸우고, 자다가도 싸우고, 하여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여느 가족의 싸움이 그러하듯, 다툼의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다. 별거 아닌 일들이 탑처럼 쌓여 함께 사는 식구들 사이를 망쳐놓는다.


우리가 그렇게 싸워도 엄마가 나를 혼낸 기억이 별로 없다. 엄마는 동생에게 누나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엄마가 없을 때는 누나가 동생을 돌볼 거라고 했다. 덩치가 있다고 누나에게 덤비거나 반말을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 남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둘이 똑같이 혼나거나 동생이 더 혼나거나 했다. 동생은 억울하다는 말도 안 했다. 오히려 만날 나만 원통해 길길이 뛰었을 뿐.


엄마가 그렇게 내 편을 드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초조했다. 승리자는 나인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생을 향해 못된 말을 내뱉고, 괜한 일로 시비를 걸고, 억지를 부려서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아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동생은 나와 싸우는 대신 참기 시작했고, 나에게 거의 다 맞춰줬다. 그냥 자기가 손해를 보고 양보했다. 나에게 잘잘못을 따져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말이 안 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엄마를 꼭 닮아 있었다.


그렇게 닮은 두 사람은 서로 애정 표현도 안 하고, 미안하다거나 억울하다고도 안 하고,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묵묵히 서서 슬쩍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서로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잠잠하지만 확고한 신뢰의 마음이었다. 요란하게 사랑의 증명을 요구하는 나는 그럴수록 초라해질 뿐이었다. 깊고 푸른 바다의 아름다움을 질시하는 붉은 사막처럼 나는 황량하고 쓸쓸했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우뚝 서있을 때 사람은 유치해진다. 자기는 손해 보면 안 되고, 불편해도 안되고, 상처받아서도 안된다고 믿는다. 어린 인간의 괴로움은 바로 이런 편협한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다.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적개심으로 불타는 인간과 직면해야 했었다. 신의 뜻을 따라 세상에 왔을 뿐인데, 자기를 죽어라 미워하고 괴롭히는 존재와 같이 살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의 인생 드라마에서 과연 누가 악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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