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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 연애사

feat. 내 핏줄의 연애 잔혹사

by 난화

현실 남매의 특징: 어릴 때는 박 터지게 싸우지만 사춘기 지나면서 남처럼 지냄.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좋지도 않음. 내 핏줄이 진지한 척 멋있는 척 어른인 척하면 가차 없이 밟아 줌. 성인이 되고 나서 경조사는 같이 챙기지만 따로 연락은 안 함. 무소식이 희소식임.


동생과 만나면 우리는 현재가 아닌 옛 추억을 꺼내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둘 다 사십 넘어 사는 게 고단한데 굳이 그런 이야기를 화제로 삼고 싶지 않은 것이다. 회사 사정이 안 좋고, 애들 키우기가 힘들고, 집을 사려고 알아는 보는데 대출이 문제고... 어른의 대화란 참 김샌다. 같이 한 집에 살 때는 각자도생 하며 무심하게 지냈는데, 정작 둘 다 결혼해서 가정이 생기고 나서는 서로 대화 나누기가 편안해졌다.


나는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이 커지면서, "정말?" 하고 놀랄 때가 많다. 분명히 같이 살았고, 같이 밥도 먹고 매일 얼굴을 봤는데 동생의 학창 시절이나 대학 생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맞장구치며 나누는 옛 추억은 11살 이전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동생의 연애 이야기는 아줌마의 주책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 재채기는 감출 수 없다는데, 동생은 전혀 티 내지 않고 잘도 지나왔다. 만약 그 시절에 동생의 연애를 목격했다면? 나는 당연히 우웩 하며 니가 연애를? 하고는 마구 놀려대고 비웃었을 게 뻔하다. 우리는 진정한 현실남매였으니까 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거구였던 동생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살이 쪽 빠졌다. 살에 가려져있던 이목구비가 드러나면서 제법 호감형이 되었고, 농구와 달리기를 즐겨서인지 몸도 단단하니 봐줄 만했다. 다이어트는 집 근처 골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옛 동창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녀를 만난 다음날부터 동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조깅을 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서 고백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연락처도 묻지 못하고 그저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만을 고대하며 매일 뛰었다. 그렇게 1년 넘게 시간이 흐르고, 동생은 드디어 그녀와 재회했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함께였다. 그때 동생은 생각했다. 겨우 저런 녀석과 만날 거였다면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 볼 걸.


꺄아~~ 뭐야 뭐야~ 고백도 못 하고 끝난 거야? 그래서 살을 뺀 거였어? 아니 왜 연락처도 안 물어보고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대? 그게 뭐야~~


나는 예나 지금이나 동생의 진지함에 확 찬물을 끼얹어 버린다. 만약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어머, 그랬어? 진짜 순수했다~ 너무 아련한 추억이네." 하면서 같이 몽글몽글한 추억 속에 폭 잠겼을 것이다. 그런데 내 핏줄의 순정에는 왜 이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까. 중간에 놀리고 싶고 비웃고 싶은 주둥이를 꾹 잡으면서, '나는 어른이다, 나는 성숙하다, 나는 가만히 있는다'를 주술처럼 되뇌었다.


처음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참 방황했었다고, 사실 자기가 자신감이 부족했노라고, 그런 자기 옆에 오랫동안 있어 준 지금 이 사람이 참 고마웠노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 까불던 내 마음이 짐짓 차분해졌다. 나보다 어린 '동생'이기 때문에 어리숙하고 부족하다는 착각을 했었나 보다. 동생은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졌다. 자신의 사랑의 과정에 대해 담담히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아, 그랬구나.


이 말이면 충분할 것 같다. 평생 현실 남매랍시고 해주지 못한 그 단순한 말. 동생의 마음을 인정해 주는 이 말을 지금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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