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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척 하는 사이

by 난화

상상해 본다. 내가 송혜교나 전지현이라면, 아이브의 장원영이나 블랙핑크의 제니라면, 동생이 나를 자기 누나라고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을까? 길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을까? 누나랑 같은 학교 다니겠다고 열심히 공부했을까?


예쁘고 늘씬하고 인기 많고 성공해서 돈까지 많은 누나는 5천만 명 중에 10명이 될까 말까 하니 동생이 이런 이유로 나를 외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거꾸로 내 동생의 인물이 제법 봐줄 만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동생을 자랑스러워한 것은 아니었다.


"누나아~~ 같이 가아~~~"


어릴 때 동생은 내 뒤를 늘 쫓아다녔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어른 없는 집에서 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마치 소녀 가장처럼 빈 집에서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간장에 밥을 비벼 먹였다. 내가 10살, 동생이 8살이 되던 해부터 같이 학교에 다녔으니까 동생과 붙어 다닐 일은 더 많아졌다.


엄마는 나에게 동생을 맡겼다.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엄마라고 했다. 어린 나에게 '엄마'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친구들과 공기놀이나 고무줄놀이를 하고 비밀 이야기를 나눌 시기였다. 천방지축 남동생은 가만히 앉아 이런 놀이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도리어 훼방을 놨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동생을 달고 오면 싫은 눈치를 주었다. 그때 친구는 나의 전부였다. 동생 따위보다는 친구가 훨씬 중요했다.


나를 부르는 동생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막 뛰어가면서, 내 마음은 짜증과 서글픔이 동시에 몰려왔다. 동생이 오면 귀찮아지고 분위기도 망치니까 짜증이 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동생을 매몰차게 버리고 가는 꼬마 엄마의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내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동생은 어느새 함께 공을 찰 친구들과 PC방 동지들을 만났다. 더 이상 우리는 함께 다니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며 둘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우리는 엄마를 중개인으로 둔 동거인의 관계에 불과했다. 학교 다녀와서 저녁 먹고 나면 각자 방에서 안 나왔다. 우리가 밖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집에서도 아는 척을 안 하는데, 밖에서 할 리가 없다. 좁은 동네이고 가는 곳이 뻔하다 보니 오며 가며 서로 봤지만, 눈을 돌리고 각자 갈 길을 갔다. 그게 현실 남매의 기본 값 아니던가.


그렇게 각자 알아서 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가고, 연애를 하고, 직장 생활을 했다. 그 사이 우리 남매를 묶어 주던 엄마가 영영 먼 길을 가버렸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은 나의 유일한 친정 식구로 남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의지할 곳 없이 아이를 키우느라 쩔쩔매던 시절, 내가 심하게 아프거나 괴로움이 목까지 차서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혹시 오늘 와줄 수 있어? 일 있으면 괜찮고."라고 하면 동생은 어김없이 "갈게." 했다.


목 빠지게 동생을 기다리다가 현관에 동생이 나타나면, 나는 왈칵 솟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외면했던 동생이 나를 모른 척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와줘서, 친정 엄마 없이 아기를 키우는 고달픈 내 삶을 들킨 게 서러워서, 내가 미안해하지 않도록 괜한 우스갯소리를 꺼내는 동생에게 고마워서, 나는 울음을 참기가 아주 많이 힘들었다.


얼마 전, 동생집과 제법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왔다. 동생도 결혼을 해서 자기 가정이 있으니까 전처럼 갑자기 연락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씩씩하게 새로운 동네에 적응 중이고, 길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있다. 그러다 저기 길 건너에 모자를 눌러쓴 청년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멈춰 한참을 바라본다. 동생과 너무 닮아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동생을 닮은 사람만 봐도 반갑고 애석한 마음이 들다니. 대한민국 현실남매 면허를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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