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 옛날에 멋쟁이 엄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미인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각적인 스타일 연출로 시선을 끌고는 했답니다. 도도한 걸음걸이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어요. 그녀에게는 떡두꺼비 같은 딸과 토깽이 같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엄마의 유전자를 전혀 물려받지 못한 두꺼비 딸은 피나는 노력으로 후계자 자리를 노렸고요, 러블리한 토끼 아들은 생긴 대로 대충대충 살 작정인 모양이었어요. 과연 이 남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저 이야기는 우리 가족 우화이다. 아니, 이씨 쪽 남매들 전체의 사정이 비슷하니 우리 가문의 시그니처 우화라고도 볼 수 있다. 왕년에 큰이모와 우리 엄마는 함께 의상실을 운영했었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라면 사듯 쉽게 옷을 사입을 수 있지만, 우리 어머니들의 전성기인 70년대에는 괜찮은 옷을 사 입기가 만만치 않았다. 지금같이 상당한 수준의 기성복이 나오기 전, 의상실은 개별 손님의 맞춤복을 제작해 파는 곳이었다. 본인들이 옷을 만들어 팔아서 그런지 몰라도 두 자매의 패션 감각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후발주자인 막내이모도 만만치 않았다. 늦둥이였던 막내이모는 충청도 촌에서 자라면서도 나이키만 신었다. 엄격하고 깐깐했던 외할아버지는 외지에 나가있는 딸들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마흔 둥이 막내에게 완전히 무장해제 되었다. 덕분에 이모는 읍내 부잣집 애들이나 갖는 브랜드의 신발을 원 없이 신었다. 지금은 알뜰살뜰 전형적인 K-워킹맘의 삶을 살고 있는 막내 이모의 화려했던 청춘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0살인 나에게 이모는 현실에서 만난 가장 예쁜 아가씨였다. 똥꼬가 보일랑말랑 하는 짧은 스커트, GUESS라고 크게 박혀있던 자줏빛 셔츠, 하얀 얼굴에 귀신처럼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집을 나서면 우리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야! 다 벗고 어딜 나가!" 하며 쫓아 나갔다.
이씨 가문의 패션 선두주자 3 자매가 사이좋게 낳은 남매들의 사정은?
사촌 오빠: 곱상한 외모에 마른 몸, 동년배보다 최소 7년은 젊어 보이는 동안임. 20대 때도 아버지가 입던 체크 셔츠를 교복처럼 입고, 결혼 후에도 주구장창 입다가 새언니의 분노로 간신히 폐기 처분됨. 연봉도 엄청나게 높지만 옷은 안 사고, 신발도 아웃렛에서 할인율 엄청 큰 것만 삼.
내 동생: 얼굴이 작고 비율이 좋아 기본만 입어도 충분히 훌륭함. 그런데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의복 관념을 갖고 있어서, 옷을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용도로만 이용함. 가끔 멋 내고 싶을 때는 연예인처럼 심하게 치장해서 더 못나짐. 비루하거나 과하거나 둘 중에 하나임. 그 얼굴과 몸뚱아리가 아까움.
사촌 동생: 우리 가문 남자들 중 키가 가장 커서 180 가까이 됨. 얼굴이 하얗고 눈이 커서 딱 요즘 애들 스타일로 생김. 한마디로 진짜 진짜 아무거나 입어도 됨. 그러나 지난번 하얀색 멜빵바지 입은 거 보고 이씨 가문 남자들에 대한 저주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신함.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로 친다면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토끼다. 타고난 신체 조건이 아주 유리하다. 남자 형제와 늘 비교당하며 살았던 우리 여자들은 교복을 벗자마자 각성하여 그간의 설움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뭐 안 꾸며서 그렇지 작정하고 치장하면 얼마든지 봐줄만하다. 아니, 봐줄 만하게 만드느라 돈도 많이 쓰고 실패도 많이 했다.
머리 감고, 말리고, 고데기하고, 앞머리 롤 말고, 스킨, 로션, 에센스, 크림 정성스레 바르고, 선크림은 기본이고, 바탕색 칠해주고, 눈썹 그리고, 라인 그리고, 맞다 눈썹 올리고, 립도 두 가지 섞어 바르고, 립과 맞춰서 생기 있게 볼터치 촥촥! 이제 겨우 메이크업만 끝났다. 옷장 열어서 위아래 세팅하고, 겉옷 살려주는 속옷 체크하고, 착장에 어울리는 양말 찾고, 양말에 어울리는 신발 꺼내고, 스타일에 맞는 외투와 가방까지 정하면 드디어 외출이다. 그냥 나가면 되는데 나가다 말고 굳이 꼭 묻는다.
"나 오늘 어때?"
"어, 못생겼어."
쳐다보지도 않고 뱉는 말이 항상 일관성 있게 똑같다. 저런 답이 나올 게 뻔한데도 미련하게 매번 묻는 내가 죄인이다. 왜 내 핏줄은 나의 센스를 인정해 주지 못하는가? 뭐 괜찮네, 정도만 했어도 그렇게 김새지는 않을 텐데 차가운 악플을 면전에 집어던질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하긴 자기 오빠가 박보검이나 김수현이어도 매일 감동할 동생은 없다. 보검씨나 수현씨도 집에서는 츄리링에 늘어진 흰 티를 입고 소파에 디비져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평범한 오빠일 테니 말이다. 동생은 내가 집에서 개기름 흐르는 이마를 머리띠로 까고 국물 튄 티셔츠를 입은 채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걸 맨날 목격하는 게 일상이다. 나의 화려한 외출이 동생에게는 스파이더맨의 변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내가 멋쟁이 엄마의 후계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러니 당당하게 외칠란다.
"니가 패션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