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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쟁탈전

by 난화

엄마는 정말 아들을 더 사랑할까?


우리네 할머니들은 노골적으로 아들만 사랑했다. 아들이 나올 때까지 5명이든 10명이든 끝까지 아이를 낳았고, 그렇게 탄생한 아들은 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 딸들은 집의 일꾼 노릇을 하고 아들들의 학비를 댔다. 딸은 공부를 많이 할 필요도 없고 글이나 읽고 쓸 줄 알면 된다고 여겼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장가가서 나 몰라라 하고 병수발은 딸들이 다 하는데, 재산은 전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아들 사업자금 대느라 이미 남은 것도 없는데, 딸들이 준 용돈을 잘 모았다가 아들 주머니에 찔러 줘야 마음이 편하다. 대한민국에는 지극한 아들 사랑에 상처받은 딸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시대가 회까닥 변해서 아들 딸 구별 없이 키우는 세상이 왔다. 우리 부모 세대는 산업화 시대의 역군으로 바지런히 살면서 자식들 밥 먹이고 교육을 시켰다. 사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자식들을 차별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다. 아침 일찍 일하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고, 그 와중에 시골 부모님 챙기고 시동생도 거두고 교회에서 봉사도 도맡아 했다. 그러니 둘 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지만 포근히 들여다보며 키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성실하게 사는 걸 미덕으로 알던 때였다. 어찌 보면 남매 모두 공평하게 부모의 무관심 속에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딸의 가슴에만 멍울이 남아 있는 걸까?


큰이모는 말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상장을 수두룩하게 받아와도, 딸이 주눅 들까 봐 칭찬 한 번을 제대로 못했다고. 아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회초리를 들고 모질게 가르쳤지만, 몸과 마음이 약한 딸은 행여 다칠까 봐 엉덩이 한 번을 못 때렸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도 이모부가 딸을 업어서 등교시키자, 선생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만류해서 겨우 떼어 놓았다고 했다.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 장사해서 번 돈을 그대로 딸 병원비에 썼다고 했다.


언니는 말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엄마 아빠가 교회에 가 있느라 집에는 밥도 없이 혼자 방치되어 있었다고. 아들한테는 집안의 어려운 사정을 하나도 말하지 않아서 모든 걸 아는 자기 혼자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고. 부모 가게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일했는데 그런 건 전혀 인정해주지 않고 아들이 부모에게 해 준 돈만 기억한다며 서운해했다. 밖에 나가면 아들이 해준 건 자랑하고 딸이 해준 건 당연한지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말이다.


50을 바라보는 언니는 70이 넘은 엄마에게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 늙은 엄마에게 욱해서 소리를 치고 후회하며 나에게 전화를 건다. 언니가 이런저런 속상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데, 내게는 딱 한 문장으로 들린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 인정받고 싶어."


주제넘게 언니에게 이 말을 꺼내지는 못해도, 늘 엄마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살았던 나는 언니의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꽥꽥 소리치고 원망하지만, 사실은 자기의 노력과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이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이 잊히지 않는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 아직도 과거의 일들을 꺼내어 엄마 앞에 들이미는 게 철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언니 안에는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그 아이는 고집이 너무 세서, 자신이 엄마의 사랑을 원한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한다.


자식이 여럿이면 어려운 자식이 있고 편한 자식이 있다. 의지가 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늘 위태위태한 자식도 있다. 아들이고 딸이고를 떠나서 아이의 성향과 기질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외동딸 하나를 키우는데, 아들도 하나 낳았다면 좀 달라졌을까 잠깐 생각해 본다. 부모가 어떻게 그 속을 뒤집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 자기를 원망하며 악쓰는 50된 자식의 반찬 걱정을 하는 이모의 진심을 언니가 더 늦기 전에 알아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엄마 쟁탈전을 할 필요는 없다고. 엄마는 딸도, 아들도, 영원히 사랑한다고. 그러니 언니도 솔직하게 엄마를 사랑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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