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보면 항상 그녀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예쁘지만 자기가 예쁜 줄 모른 채 열심히 살아가다가, 우연+우연이 이어지면서 재벌 3세 실장님과 인연을 맺는다. 보통 남자 주인공의 약혼녀이거나 직장 동료이거나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던 화장 진하고 기 센 여자가 이들 사이를 방해하는데, '아무것도 몰라요'식의 순수한 여주인공을 어찌나 죽어라 괴롭히는지 모른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어 있다. 박복하지만 열심히 살고자 하는 여자 주인공이 그녀의 뺨을 때리고 모욕을 주는 악녀를 물리치고 사랑과 신분 상승 모두 쟁취하기를 기원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능력도 있는 여자가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주인공까지 차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악역을 맡은 여자는 절규하며 외친다.
"니까짓 게 뭔데 감히 그 사람을 넘 봐?"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나도 저 대사를 던진 적이 있다. 대학에 가서 과대표도 하고 대학 축제에 댄스팀으로 참가하고 여자친구까지 생긴 동생을 가리키며, 나는 엄마에게 악을 썼다.
"쟤가 뭘 했다고 이렇게 행복한 건데......!!!!!"
그러고 나서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분명한 악역이었다. 나의 불행과 선명히 대비되는 형제의 행복을 견디지 못하는 찌질한 역할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된 자신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고 싶다.
우리 집은 '개천에서 용 나기'를 목표로 살았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외로워도,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용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집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전기나 소공녀 등의 책을 읽으며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성공할 나 자신을 꿈꾸며 자랐다.
그렇다고 내가 신문 기사 인터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엄청나게 성실하게 살았거나 주경야독하는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정작 잘 안 되니까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면서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독하게 공부해서 원하는 성적을 얻었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 뜻대로 되지 않고 목표 대학에 가지 못했다. 방황의 시작이었다. 대학에 가긴 갔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만큼 지독한 우울이 계속되었다.
반면 동생은 애초부터 자기가 잘 되거나 뭘 이루는 데 관심이 없었다. 책가방 던져놓고 맨날 밖으로 돌았다. 같은 국민학교에 다니니까 친구들이 와서 "니 동생 복도에서 벌서고 있더라." 하고 일러주기도 했다. 엄마가 동생 데리고 도서관에 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갔더니 동생은 거기에 있는 모든 무협지를 섭렵했다. 중학교 때는 무스로 머리 쫙 넘기고 건달처럼 하고 다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 부적응자로 엎드려 자다가 도시락 까먹고 귀가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동생더러 똑똑하다고 했다. 사촌 오빠는 나와 동생을 앉혀 놓고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나서 엄마에게 나보다 동생이 훨씬 잘 알아듣는다고 전했다. 내가 그 말을 다 듣고 있는데 말이다. 어쩌다 속셈 학원 한 달 보내줬더니 동생은 갑자기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탔다. 아침 조회 시간에 자기 이름을 호명하길래 떠들다 걸려 엎드려뻗쳐하는 줄 알고 나갔는데, 갑자기 상을 줬다고 했다. 육상 경기를 하면 1등으로 들어오고 선생님의 포섭으로 육상부에 들어가기도 했다. 개다리춤을 잘 춰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잘했다.
수능 시험 언어 영역 시간에 답안지 12번을 바꿨다는 동생이 갈 만한 대학은 없었다. 내신도 엉망이고, 수능은 더 엉망이었다. 경기도는 어렵고 천안 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마침 인근 4년제 대학에 신설되는 전공에서 면접 100% 전형이 생겼다. 예상대로 동생은 합격했고, 그 뒤에 물 만난 미꾸라지처럼 대학을 휘젓고 다니며 화려한 청춘을 만끽했다. 너무 신나서 집에도 안 들어오고 학교 기숙사에 있는 친구 방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그때 나는 내 노력을 배반한 세상의 부조리보다, 동생이 누리는 행복에 더 분노했다. 엄마의 사랑도 빼앗고, 내가 갖지 못한 많은 재능을 지니고, 그러고도 착하기까지 한 동생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그게 뭐 대수냐는 듯이 쉽게 얻는 동생 옆에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어린 나는 자기 자신도 괴롭히고 동생도 괴롭혔다. 그리고 이런 남매를 바라보는 엄마를 괴롭게 했다. 사실 엄마와 동생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내가 긴 우울의 터널을 지나 비로소 빛을 발견했을 때, 미련했던 나 때문에 아팠을 가족을 향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누나, 고3 때 누나 공부하는 거 보고 진짜 존경스러웠어. 그건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거니까. 누나가 읽고 꽂아 놓은 고전문학 책들, 너무 심심해서 나도 다 읽었거든. 그때 독서라도 해서 뒤늦게 뭐라도 할 수 있었나 봐."
나의 진심에 동생도 진심으로 답했다. 과거 나 빼고 동생 혼자만 행복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나는 이제 동생의 인생이 좀 수월하기를, 나가서 인정받고 아내와도 알콩달콩 예쁘게 살기를,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하는 누나가 되었다.
엄마가 하늘에서 우리 애들 참 예쁘다, 하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