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d for now
Way Maker? 나? 너? 어디? 무엇을?
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도 아니었고, 모태신앙은 더더욱 아니었고.. 책임감과 의리로 교회를 다니는.. 말 그대로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다.
해외 생활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처럼 그냥 의례 그렇 듯, 그냥 다녔다.
그렇다고 한국사람이 그립거나 한국 커뮤니티에 속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남편의 집안이 기독교집안이었는데, 모태신앙이 아닌 '못해신앙' 같았던 남편이 나에게 교회 가자고 회유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와이프가 새신자라서 그 부부가 교회를 오지 않나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나의 별거 없는 자존심과 교회를 다녀보겠다 다짐한 나름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10여 년을 여러 일들을 겪으며 교회생활을 했지만 의심 많은 나에게 믿음생활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고 교회생활 14년 차가 되면서 '아직도 내 믿음이 이 정도면 이젠 할 만큼 했어...'라는 마음이 드는 찰나였다.
교회를 내려 놓고 가톨릭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쯤.
계속 궁금했던 그 질문...
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가톨릭 학교 특성상 이 곳에서 일을 하는 동안 10여 년의 교회생활때보다 더 자주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다. 학교의 보조교사로서 부족할 수 있는 내가 나의 상식이 아닌 성경의 말씀에 기반하여 훈육을 해야 있는 환경이었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내가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 곳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서 멀어졌던 우리 가족은 런던의 모교 교회인 일링의 교회로 다시 돌아갔고,
원래 계셨던 모든 어른 분들은 언제나처럼 성숙한 성도로써 우리를 반겨주셨다.
우리 아이들은 영국인 이면서 한국인으로서 영국 사회에 속하면서 교회 안에서 또 한국인 공동체 생활과 문화를 알아갔다.
믿음의 공동체라는 말은 나에겐 너무나 오그라드는 말이었고, 뭔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임 같았고,
부담스러운 단어였다.
그런 나였는데...
이제는 그 단어가 나에겐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지고 그 공동체의 한명일 수 있음에 감사함까지 느낀다.
어느새 익숙해버린 이방인 생활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은.. 그 누군가가 나를 보듬어서가 아니었다. 나의 마음이 이제야 준비가 되었기에 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의 믿음이 갑자기 홀리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배울게 많지만, 적어도 나는 옆드릴 줄 알게되었고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게 부끄럽지 않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내가 궁금했던 그 질문.
"왜?"
결국 그것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아마도 여전히 어디론가 가는 중일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누가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망'
이라는 게 생겼다.
이끌어 주시는 그 끝에서 나라는 존재가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잘 사용되고 있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
처음 계획과는 달리 상황들의 디테일을 쓰다 보니 TA의 정보 부분 보단 여정에 더 집중이 되었던 것 같아요.
TA정보나 영국 교육 부분에 대해서는 매거진이나 다른 연제북으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5개월의 연제를 마치며...
부족한 글발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쓰고 읽는 모든 분들에게 축복만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