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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Dec 29. 2023

힘이 든 날/ 힘을 든 날

당신은 나의 바닥입니다.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힘들다’는 말은 글자만 보면 힘을 ‘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들고 있는 것은 내리누르는 힘 때문입니다. 들고 있는 힘은 땅이 끌어당기는 그만큼의 힘을 들고 버티고 있는 것이지요.


땅은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힘든 현실은 삶의 순간마다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힘에 눌린 판정입니다.


힘든 현실을 버텨내려는 것은 그 내리누르는 ‘현실’을 ‘들고’ 있는 ‘힘든’ 모습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 그만큼의 ‘힘’을 ‘들고’ 버텨내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이 든 날’은 ‘힘을 든 날’입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힘든’ 날들에서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일은 ‘들고’ 있는 ‘힘’을 잠시 내려놓는 일뿐입니다.     



신의 형벌의 대표로 시지프스를 떠 올리곤 합니다.

한 번에 끝나지 않는 ‘힘듦의 반복’ 때문입니다.

힘듦의 반복이 고통인 것은 시지프스의 선택이 아니라, 제우스의 선고(宣告)여서입니다.


힘듦이 타의(他意)가 아니라 자의(自意)라면 근육을 기르는 의지입니다.


‘힘이 드는’ 것은 타의가 이유이고,

‘힘을 드는’ 것은 자의가 만드는 일입니다.


‘이방인’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끝나지 않는 신의 형벌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를 바라봅니다. 신의 저주에 반항하는 인간의 의지가 오늘의 힘듦을 ‘힘없이’ 포기하지 않고, ‘힘 있게’ 살게 하는 힘이라고 봅니다.




나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보다는 편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솔제니친이 직접 겪었던 날들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수용소 죄수들은 벽돌 쌓는 징역을 삽니다. 한 곳에 벽돌을 쌓습니다. 간수는 쌓은 벽돌을 허물고 그 벽돌을 다른 장소에 다시 쌓게 합니다. 벽돌 쌓기가 끝나면 다시 허물어 원래 자리에 다시 쌓게 합니다. 매일의 반복입니다.


죄수들이 견디다 못해 죽어갑니다. 힘듦의 반복을 육체보다 정신이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의로 인한 의미 없는 삶의 반복은 자의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타의로 인한 의미 없는 ‘힘듦’의 반복을 바닥에 내려놓는 자의의 결단이 살게 하는 길입니다.

타의로 인해 힘이 들리는 반복되는 ‘힘듦’에서 벗어나는 일은,

내일의 근육을 위해 오늘 스스로 힘을 들어 올리는 자의의 ‘힘듦’을 지속하는 일입니다.

   

힘이 든 날이 타의로 힘을 든 날이라면,
이제 자의로 힘을 들 날로 마음을 고쳐 잡습니다.




당신이 밖에서 ‘힘들’ 게 살아가는 날들과, 내가 안에서 ‘힘을 들여’ 살아가야 하는 일이 모두 같아 보이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들고 있는 ‘힘듦’을 잠시 내려놓기를 바라고, 나는 나의 의지로 내 마음과 정신의 근육을 기르는 ‘힘듦’의 반복을 끊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똑같은 일과의 반복으로 비치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옥은 타의에 의한 반복을 깨고, 매일 변하는 다름의 깨우침을 자의로 반복하는 일입니다.


“가지 않는 수레라고, 수레바퀴에 채찍질한다고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번뜩이는 죽비(竹篦)를 맞습니다.     


길섶에 놓인 새끼줄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이전에 뱀을 보고 놀랐던 사람입니다.


경험과 인식은 고정된 관성의 힘으로 작동합니다.

고정된 관념의 집착이 만든 번뇌가 표출(表出)된 한 예가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체현(體現)된 인식이 고착된 이념(理念)이 되면 새끼줄을 뱀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로 대표되는 것이, 선(善)과 의(義) 일 것입니다.

법(法)을 정(正)으로 믿는 이들은 적어 보입니다.


여신(유스티치아)에게 정의(正義)의 판결을 맡길 때, 저울과 칼을 준 다음 마지막으로 눈을 가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화가 아닌 현실에서 눈을 가리고 공판과 선고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판결에 원고와 피고가 모두 긍정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바르고(正) 옳음(義)은 고정된 ‘정의’(定意)가 아닌가 봅니다.


불변(不變)의 가치와 신념(信念)이 인종과 종교 간 학살로 나타난 예는 예나 지금이나 헤아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선(善)과 의(義)는 상대를 적대시하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의 자리마다 선(善)과 의(義)조차도 불변의 진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개별의 인식마저 하나의 전체로 고정시키는 이즘(ism/主義)들은 갈등과 대립의 선봉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열사(烈士)’가, 저기서는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단 하나’(the One)의 진리(眞理)를 고집하는 이념(理念)에서 걸어 나와, ‘하나’(a/an)의 일리(一理)로 다가서는 이성(理性)이 필요해 보입니다.


너’에게서 ‘일리 있네’를 보고,

‘그’에게서 ‘일리 있음’을 보는 일들이 모이면,

그것이 곧 ‘합리’(合理)적인 삶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이정표(里程標)가 될 것입니다.     



항소(抗訴)를 앞에 두고 ‘단 하나’의 법리(法理)를 내세우며 자의 없는 타의의 판결을 기다리는 때에, ‘일리’(一理)를 수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닥으로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잡고 일어서지 못합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닥을 딛고 살아갑니다.

바닥이 단단해야 서서 버틸 수가 있습니다.

모든 버팀의 시작은 바닥입니다.


가족은 바닥입니다.

힘든 날에 단단한 버팀이 되어주는 가족입니다.

들고 있는 무거운 힘을 내려놓을 수 있게 받아주는 단단한 바닥이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제 힘을 기르는 힘을 들 수 있게, 딛고 일어서게 하는 가족입니다.


당신은 나의 바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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