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절필동 Jan 02. 2024

‘즉시현금’입니다

차 한 잔 드시지요

이전에 있던 곳에서 온수 목욕을 가고 오며 좁은 통문을 거쳐야 했습니다. 

통문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철창문입니다. 

통문 위에 크게 걸려있던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간판 밑으로 고개를 숙여 지나갔습니다. 


이감(移監)을 와서 면회실을 다녀오는 길이 같은 간판 아래로 지나갑니다. 

누구도 소리 내어 읽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아는 주문(呪文)이 되었을 겁니다. 

어쩌면 밖에서 저 주문을 외면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들어왔나 봅니다.   

  


이곳에서 자주 보는 글 중 하나가 ‘감옥은 터널이지 동굴이 아니다’입니다. 

막혀 있는 어둠이 아니라, 뚫려 있는 어둠입니다. 동굴의 끝은 어둠이지만, 터널의 끝은 빛입니다.


대낮에 반딧불을 보았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둠에 갇힌 이들만이 빛을 따라갑니다.




구속으로 지난 삶을 ‘끝’으로 맞았던 이들은, 이제는 수감의 ‘끝’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끝’이 절망이면서 ‘끝’은 희망이기도 합니다. 


전날의 ‘끝’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앞날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은 오늘을 ‘남은 생의 첫날’로 여기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사람일 것입니다.   

  

수인(囚人)은 시한부(時限附)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수인은 불치(不治) 병을 선고받고 언제 올지 모르는 ‘끝 날’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수인은 다시 살 날을 위한 완치(完治)의 ‘끝 날’을 알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궁벽한 곳에 오래 살면 관점마저 좁아지고 치우쳐, 흡사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 동굴의 아궁이를 동쪽이라고 착각”한다. 

신 선생님이 감옥에서 12년을 보내고 있던 날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저러한 견해가 주관 쪽으로 많이 기운 것이 되어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라고 부모님께 보냈던 편지글에 있는 문장입니다.     


나 또한 나를 돌아보려는 걱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혼자 오래 있으면 혼자만의 주관(主觀)이 가져올 착각을 인식하지도 못하게 될지 싶은 것입니다.     


선생님은 ‘좁아지는 관점’을 염려했나 봅니다. 

주관이 ‘기울어 치우치는’ 일입니다. 

감옥의 바닥은 평평합니다. 기울어 치우칠 바닥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할 일 없는 백수가 수인은 아닙니다. 혼자서 데구루루 구를 일이 없습니다. 

혼자 있는 나에게 주관(主觀)을 넓히고 기울어 치우치지 않게 하는 일은 독서입니다.



‘관점’(觀點/ point of view)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보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은 ‘관점’이 아닙니다. 

‘점’(點)이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내가 미리 가져야 할 준비와 태도가 가리키는 중요한 ‘point’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보려는’ 것은 오늘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시인유공불상인 함인유공상인 무장역연 고술불가불신야)

활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두려워한다     


위에 옮긴 선생님의 편지글에 나오는 맹자(孟子)의 글입니다.

직업의 귀천(貴賤)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전장(戰場)을 준비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나의 염려는 당신을 향해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만들어 줄 것은 활이 아니라 방패/갑옷입니다. 

이미 상(傷)한 당신이 더 ‘상할까’를 ‘두려워’ 해야 하는 엄중한 ‘나’의 오늘이 무엇이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즉시현금’입니다.

우리말대로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即時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


자주 들었던 말인데, 중국 당나라 시절 유명한 선승이었던 임제선사의 어록집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날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서로 다른 종교가 같이 믿는 것은 ‘현금’(現今)이네요.

     



어제의 날을 오늘 살아야 하는 곳이 감옥입니다. 

감옥이 동굴이 아니라면, 터널의 ‘끝’으로 나아가는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곳이 감옥입니다. 

그 오늘이 ‘즉시현금’입니다.


감옥을 좋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인 누구나 지금보다 좀 더 좋은 곳/것들을 찾습니다. 전방(轉房)과 이송(移送)을 앞두면 더 그렇습니다. 


감옥에서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에서 찾아보면 더 낫고 좀 더 좋은 것들을 언제나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좋은 것이 찾아지면, 지금보다 나은 게 됩니다. 그때 찾은 지금은 좋게 여기게 됩니다. 


궁벽한 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즉시현금’, 지금보다 좋은 지금이 되게, 지금 할 일입니다.  



사찰을 처음 온다는 이에게 큰 스님이, “차 한 잔 드시지요” 권합니다.
이미 사찰을 많이 다녀봤다는 이에게 큰 스님이, “차 한 잔 드시지요” 권합니다.
옆에 있던 스님이, “서로 다른 이에게 왜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묻습니다.
스님에게 큰 스님이, “차 한 잔 드시지요” 권합니다.  

   

‘차 한 잔’이 같은 말이겠지만, 마시는 사람마다 다른 맛이 되겠지요. 

처음 온 이에게는 불가의 입교를 안내하는 맛이었을 테고, 

이미 오래됐다는 이에게는 계속 정진할 맛을 담았을 테고, 

수행 정진을 하고 있을 스님께는 분별심(分別)心)의 경계를 깨지 못함에 대한 일침(一針)의 ‘차 한 잔’이라는 풀이입니다.

불가에서는 오랜 선사(禪史)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황희정승의 이야기에는 ‘차 한 잔’이 아니라, 두 하인의 다툼에, ‘네가 옳다’, ‘너도 옳다’는 말에 부인이 묻는 말에도 ‘당신도 옳다’고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차(茶)보다는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오늘은 ‘차 한 잔’ 하렵니다.

커피에서 차로 취향을 바꾸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지금 '차 한 잔'이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커피 한 잔'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따뜻한 ‘차 한 잔’ 다려주는 일이면 싶습니다.


이전 17화 휴정(休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