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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05. 2024

수심(愁心)에서 수심(修心)으로 방심(放心)까지

Gelassenheit(겔라센하이트)-내맡김

감옥에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마음공부’입니다.


‘마음공부’의 가장 큰 특징은 ‘혼자’하는 것 같습니다.

‘남’의 마음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을 공부하는 것일 테니 그렇습니다.


수도자(修道者)의 모습이 집단 이전에 ‘혼자’인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수행(修行)은 가족 없는 사람들에게 허락되나 봅니다.

가족 없는 사람이 없기에, 가족을 떠나는 걸음부터 수행의 첫걸음이 되나 봅니다.



가족을 멀리 두고 감옥에서 ‘혼자’하는 마음공부가 쉽지 않은 것은,

수인(修人)과 수인(囚人)의 첫걸음이 달라서 일 겁니다.


자의(自意)로 뗀 걸음과 타의(他意)로 끌렸던 걸음이 서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걸었던 수도자는 수도원의 열린 문을 자의(自意)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걸음이 쉽지 않을 것은 물론입니다.


수인은 닫힌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습니다.

닫힌 문이 열려야 나갈 수 있는 옥문(獄門)은 자의(自意)를 막는 문입니다.

열리지 않는 문을 열려는 마음은 수심(愁心)만 일으킬 뿐입니다.


자의(自意)가 자유(自由)로우려면 수심(愁心)을 잠재우고, 수심(修心)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수인(囚人)이 수인(修人)이 되어가는 길은 ‘혼자’하는 ‘마음공부’-수심(修心)뿐입니다.    


‘책 만 권을 읽는 것은 만 리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갇힌 수인에게 허락된 여행은 독서뿐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갇힌 수심(愁心)에서 떠나는 ‘여행’의 수심(修心)은 독서입니다.


만 권이 만 리의 도착점이 아니라, 한 권, 한 줄, 한 단어에서도 만 리를 내다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Gelassenheit-내맡김

“억지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기보단 그저 ‘내어 맡김’(Gelassenheit)에 의하여…”


하이데거의 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거나, 이해했다 해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전달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자신의 실존주의 철학을 만들기 위해 없던 독일어까지 만들었다는 하이데거의 한국어 철학서는 따로 용어 해설서까지 두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한국어를 배워서 자신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겔라센하이트-내맡김’

번역자가 학승(學僧)이고 독자가 불자(佛子)였다면, ‘방하착’(放下着)-‘내려놓기/내려놓아라’로 번역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에도, 불교의 선(禪)철학에도 밝지 못해서 이해를 길게 풀어내는 일이 나의 수심(修心)은 아닙니다.

나는 ‘내어 맡김’의 상대를 따로 정해놓지 않습니다.

‘방’(放)이 향할 ‘아래’(下)를 알지 못합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벗을 만난 반가운 소식처럼 당신에게 전하고 싶어 졌습니다.

‘방’(放) 자입니다.

‘놓는다. 풀어주다, 멋대로 두다, 내 버려둔다’는 글자입니다.

수심(修心)차 읽는 독서 중에 찾아온 손님(放)을 ‘마음’(心)으로 만나니 ‘방심’(放心)입니다.


‘마음을 내려 두자, 마음을 내버려 두자, 마음을 그저 그런대로 맡겨두자’로 반갑게 만났습니다.


무언가 애써서 이루려는 마음의 착(着)을 내려(下) 놓으라(放)는 ‘방하착’은 ‘겔라센하이트-내맡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밖에서, ‘무분별(無分別)하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가, 안에 들어와, ‘무분별하게 살자’는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에는 ‘방심(放心)하지 말자’였는데, 이제는 ‘방심하며 살자’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는 잘못 번역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이면 잘 알고 있는, 그런데 잘 못 알고 있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말은 주어가 ‘내(I)’가 아니고 ‘내일(tomorrow)’입니다.. 내(I)가 내일(tomorrow)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tomorrow)의 일은 내일(tomorrow)이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tomorrow)은 내(my) 일이 아닙니다. 원문은 ‘내일(tomorrow) 일은 내일(tomorrow)이 하게 하여라’라고 전합니다.


그러니 내일(tomorrow)은 내일(tomorrow)에 ‘맡기라’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내일’에 ‘맡기는’ ‘내맡김’-겔라센하이트-방하착 입니다.

      

한 스님이 큰 스님을 찾았습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그 경계가 어떠합니까?”
큰 스님에게 묻습니다.
“방하착(내려놓거라).” 큰 스님이 답합니다.
“한 물건도 가지지 않았는데 무엇을 방하착 합니까?”
스님이 재차 묻습니다.
큰 스님이 답합니다.
“착득거(着得去-그러면 지고 가거라).”


불가에 전해오는 유명한 조주 스님의 일화라고 합니다.

‘한 물건도 가지지 않은’ 그런 빈 마음인 ‘허심’(虛心)조차도 내려놓으라는 풀이입니다.

높은 데 있는 물이 아래로 흐르면서 자신이 높은 데 있음 조차 미리 알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신이 ‘고요’(靜)마저도 ‘쉬는’(休) ‘휴정’(休靜)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휴정’(休靜)이 도피처이기보다는 안식처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 권, 한 줄, 한 단어에서 만 리를 볼 수 있는 수심(修心)의 독서는 미리 ‘방심’(放心)할 준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겔라센하이트! 방하착!


손을 쓸 수 없는 일에 손을 뻗어 휘젓지 말자고 했던 고개 숙인 내 마음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듯했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의 마음이 방심(放心)일 겁니다.

건강한 사육은 방목(放牧)입니다.

수인(囚人)의 방심(放心)은 방면(放免)과 석방(釋放)까지 가져가야 할 경계일지도 모릅니다.  



신 선생님이 가족들과 특히 아버님과의 편지가 안부가 아닌 대화이기를 바란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매일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안부가 아니라 대화여서입니다.

서로에게 ‘안부’(安否)의 염려가 없어서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물리적 단절이 대화를 끊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의 매일의 대화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을 맞댄 대화는 끝이 있고 반복이 없습니다.

글로 나누는 편지의 대화는 끝이 없고 반복해도 좋습니다.

당신과 나누는 편지 대화에는 언제나 당신의 얼굴이 맞닿아 있습니다.

글로 나누는 대화는 마음마저 깊이 닿아 있습니다.

얼굴을 맞댄 빠른 대화보다 글로 대하는 느린 대화는 서로에게 내어줄 다음 마음을 준비하게 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만남의 기쁨은 만남 전에 오나 봅니다.

‘사랑은 연인을 만나러 가는 도정(道程)에 있다’고 합니다.


소중한 것을 당신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은 어제의 수심(愁心)을 지우고, 오늘의 수심(修心)을 옮겨 전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어제와 다른 것은 어제보다 오늘 당신을 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의 사랑이 내일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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