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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12. 2024

(그런데) 차라투스트라 가라사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니체의 대표작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모두가 이해하기란 쉬운 책이 아닌 것으로도 더욱 유명합니다.

부제(副題)가 이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아인 북 퓨어 알레 운트 카이넨

  

원서가 없으니 번역서와 비교하면서 읽지는 못했습니다. 원어가 무엇이었을지를 모르면서도 번역이 정말 잘 됐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책세상>에서 2000년에 출판한 니체전집 13권, 정동호 님의 번역입니다.

여러 번역서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 모두를 비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이유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내 번역서들 책 제목은 모두 같았다는 기억입니다.



이전에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던 적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문장 하나하나 밑줄을 긋고, 여백에 나의 감상들을 적어가며 정말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서 나는 책 제목의 번역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독일어 ‘Also-알조’와 ‘sprach-슈프라흐’입니다. ‘이렇게’와 ‘말했다’로 모든 번역서가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이와 같이, 그래서, 그러니까, 따라서, 말하자면, 즉, 등과 같이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을 겁니다. 일상 회화에서도 길게 말하다가,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그러니까, 즉… 등으로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로 번역한 ‘Also-알조’는 이제 새롭게 말할 어떤 내용을 위해 앞에 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말했던 내용을 이어가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을 앞두고 좀 더 경청할 수 있도록 주의를 집중시키는 이끎 말입니다.


그러니, ‘Also sprach Zarathustra’라는 책의 제목은, 니체가 이전에 했던 말들을 이제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켜 결론적으로, 요약해서, 그러니까, 따라서, ‘이렇게말한 것이라는 함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을 읽기 전에, 니체의 그 이전 책들인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그리고 저 유명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들을 먼저 읽을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책(『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을 다 읽고서 강하게 느낀 게 있습니다.



바로 신약성서 복음서와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제5복음서'라는 말이 있는 이유를 알 듯합니다.


예수의 공생애가 서른에 시작했듯이(“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누가복음 3장 23절), 책의 첫 문장은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로 시작합니다.


물론 복음서와 내용은 아주 다릅니다.

다만 신약성서 복음서에 나타난 많은 비유와 은유, 상징들 그리고 예수의 언행을 충분히 떠 올릴 수 있게 하는 의도적으로 빗댄 것들이 많다는 느낌이었지요.


그러니까, ‘Also-알조’는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단순한 ‘이렇게’의 소개가 아닙니다. 예수의 말에 비해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말했는지를 대조하려 했던 ‘이렇게’입니다.


우리말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말은 항상, ‘예수께서 가라사대(sparch-슈프라흐)’로 나타납니다.


니체가 오랜 서양 기독교 신앙에 대척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신은 죽었다’로 대표되지요.

내가 니체의 사상과 기독교 신학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신약성서의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예수와 대조해서 ‘차라투스트라’를 등장시켜 기독교 사상과 대치되는 그의 사상을 펼쳐나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sparch-슈프라흐)’였다면, 그에 비해 차라투스트라는 어떻게 '가라사대' 했는지(sparch-슈프라흐)를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Also-알조’는 단순히 ‘이렇게’가 아니라, 예수가 했던 말에 대한 대척점에서의 ‘이렇게’입니다.


그냥 쓰면 그 뜻이 잘 드러나지 않을 테니, 미리 반어적 의미를 넣어 ‘그런데’를 괄호 안에 넣어 번역하는 게 좋아 보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했다-sprach-슈프라흐’입니다.

예수의 말과 비교를 분명하게 드러내려면 ‘가라사대’가 어울려 보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가라사대’입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으니,


'(그런데) 차라투스트라 가라사대'가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하면 한국 독자들에게는 제목에서부터 예수의 ‘가라사대’와 무엇이 다를까를 먼저 떠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오늘은 니체의 말들로 아픈 하루를 보냅니다.


니체는 ‘고통의 처방은 아픔뿐’이라고 했습니다.

아프지 않은 주사가 없습니다.

 

‘있기’를 바라는데 ‘없음’을 볼 때, 힘이 듭니다.

‘없기’를 바랄 때, ‘있음’을 보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원(願)하는 마음(心)이야 탓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바라는(欲) 것에 마음(心)을 더하고 더하면 욕심(慾心)이 됩니다.

만족(滿足)의 경계를 넘어서면 넘치는 것이겠지요. ‘만큼’을 아는 일이 힘든 마음을 잠재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넘침’의 쏟아짐을 미리 알고 ‘내어놓는’ 연잎의 지혜를 떠올립니다.


‘있기’를 바라는 데 ‘없어지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못 되어서 그렇습니다.

‘없기’를 바라는 데 ‘있는 것’도 내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든 것은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바라는 일은 힘든 희망입니다.


내 안에서 찾는 일이 아니라,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날은 고통이 태어나는 날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그리하도록 하라.”     



편해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찾습니다.


‘마음’(心)을 더 하는 일이 아니라, 빼는 일이 욕심(慾心)을 지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욕(慾) 자(字)에서 마음 심(心) 자(字)를 지우면 바랄 욕(欲) 자(字)가 됩니다.

골짜기(谷)에서 입을 벌리고(欠) 있는 모습이니, 목이 마른 사람의 해갈(解渴)입니다.

최고의 물맛은 사막에서 마시는 것입니다. 사막이 데스밸리여도 오아시스가 있으면 유토피아입니다. 오아시스는 사막에만 있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마음(心)을 비우는 ‘허심’(虛心)이 번뇌(煩惱)를 지우는 일이라는 것을 끄덕이게 합니다.  



    

“너의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이는 신(神)이 잘 돌보아 줄 것을 믿는 신자(信者)입니다. 그런데, 앞뒤 본문을 길게 읽어보면 현재의 고난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는 말과 닿아 있습니다.

나의 ‘염려’를 신에게 맡기면 신이 나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으로 더욱 밀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꺼이 고난에 처하겠다는 믿음을 택하는 이가 신자(信者)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히브리 선조들의 믿음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를 결단하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살리려고 나를 죽이라는 말로 들립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허심(虛心)과 기독교가 말하는 전적신뢰(全的信賴)는 어찌 보면 지금의 처지와 형편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에 처(處)하라는 닮은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 '지금'이 고난과 고통의 자리일 때가 더 그렇습니다.

지금의 자리에 앉는 것이 허무(虛無)와 포기가 아닌 것은 물론입니다.


지금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은 도약(跳躍)의 디딤을 다지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amor fati – 네 운명을 사랑하라)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 정해진 운명과 숙명에 아무 힘도 쓸 수 없다는 것을 니체가 말하는 게 아닌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니체에게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이상주의(관념론)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살피면 그 안에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분노’가 피어 있습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분노를 마음에 품는 것은 스스로 독약을 먹고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지난달 한 방에 있던 이가 1심 출정을 나갔다가 사동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동 도우미가 그의 짐을 챙기러 왔습니다. 집행유예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 운동을 나갔다가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집행유예로 나간 날 피해자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날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지도, 그의 분노를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나는 그의 어리석음과 고통과 분노의 기울기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과 ‘거리두기’를 시작한 이래, 세상도 ‘거리두기’가 시작됐습니다.



AI 인공지능의 시대를 앞다투는 때에 감염, 전염이라는 마치 중세적 단어를 여전히 공포로 여기고 있는 지금이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밖에서의 ‘거리두기’의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알지 못합니다.

안에 있는 이들에게 적용할 마땅한 ‘거리두기’란 담장 밖 감염지역의 사람들을 만날 때입니다.

법정에 나가는 출정 때와 접견할 때입니다.


옥담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라면, 마스크는 밖에서 안으로의 유입을 막는 유일한 차단막입니다.


거실과 침실, 식당을 함께 쓰는 감옥의 좁은 방에서 종일 옆 사람과 떨어져 지내라는 ‘거리두기’ 지침은 그저 말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오래전 의학에는 모든 병의 원인인 병균이 곧 세균이다는 등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세균 없이는 인간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현대 의학입니다. 몸속에 세포보다 많은 세균이 동거한다고 합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려고 세균을 먹고 마시기도 합니다. 발효식품은 세균이 먹다 남은 음식이라지요. 함께 동거하는 세균도 있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세균도 있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마스크가 이 시대 최고의 신약일 줄 몰랐습니다.




코로나 시대 접견실이 개그였습니다.

얼굴을 반이나 가린 마스크가 마이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접견시간이 끝나고 문을 나서던 당신은 돌아서 마스크를 내려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얼굴을 보여주려다 웃음을 들켜 보였습니다.

그 연출이 개그였는지 나도 마스크를 내리며 웃었습니다.


웃음을 보여주려는 것은 웃게 하는 개그입니다.

웃음은 전염입니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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