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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09. 2024

『고도를 기다리며』

항소심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항소심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힘든 날은 답답한 날입니다. 선후(先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답답함은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일로 인한 것이기 쉽습니다.

시험지 앞에서 느끼는 수험생의 답답함도 다르지 않습니다.

끊긴 소식으로 알 수 없는 염려의 답답함은 숨조차 쉬기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기다림’은 답답함입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늘을 힘들게 합니다.

알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리는 날은 알지 못하는 날을 힘들게 보내야 하는 답답한 기다리는 날입니다.

알 수 있게 된 날이라고 답답함이 풀리는 날이 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은 또 다른 기다림을 시작하는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이 지금은 숨쉬기 어려운 힘든 답답한 날이지만, ‘기다리기’ 때문에 숨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도 합니다.

‘기다림’은 살게 하는 놓칠 수 없는 끈입니다.

답답함을 풀 길은 ‘기다림’을 이어나가는 길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하게 하는 책 중의 하나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듯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2막으로 되어있습니다.

1막이 첫째 날이고 2막이 둘째 날입니다.


1막에서 극 중 인물은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도 모르면서 기다립니다.

후반부에 양치기 소년이 등장해 ‘고도 씨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온다’고 알리고 1막은 끝납니다.


둘째 날에도 극 중 인물들은 ‘고도’를 기다립니다.

2막에서 “내일은 고도를 만나러 와야 할 것”이라는 말로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을 보여줍니다.

‘고도’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막이 내립니다.


극 중 인물도, 관객도 ‘고도’가 누구인지, 아니 고도가 ‘무엇’ 인지도 모릅니다.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모릅니다. 극 중 인물들의 대화는 동문서답이니 줄거리가 고르지도 않습니다.


연출가가 작가에게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물었답니다.

작가 베케트는 “내가 고도가 누구/무엇인지 알았다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끝내 등장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려 온 독자와 관객에게 남은 것은 답답함이었을지 모릅니다.

등장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정해지지 않은 ‘고도’는 보는 이들에게 수많은 ‘고도’를 기다리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기다림’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기다리는 ‘고도’는 다를 겁니다.

작가는 모두의 기다림이 ‘다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나 봅니다.

‘고도’를 끝내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모두의 ‘다른’ 기다림을 ‘누구/무엇’이라고 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작품의 난해함으로 출판과 상연 후 많은 평론가의 혹평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 공연이 있었답니다. 막이 내리자 모든 수용자가 기립박수를 쳤다고 합니다. 흐뭇한 모습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수인(囚人)은 오늘 오지 않는 ‘고도’를 내일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내일 고도 씨가 온다’고 알려주는 극 중 인물이 양치기 소년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흔히 ‘거짓말쟁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 소년’이 알렸던 ‘늑대가 온다’는 외침은 언제 했던 말이냐에 따라 거짓이기도 하고 참말이었던 것을 압니다.

‘고도’의 심부름꾼인 양치기 소년의 ‘내일 고도 씨가 온다’는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는 모릅니다. ‘고도’가 늑대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을 누가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헛걸음이 되거나 모든 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늑대’를 기다리지 않은 것은 물론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 다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떠올리는 게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를 알지 못하는 답답함은 등장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답답함과 다릅니다.

그래도 작가가 ‘양치기 소년’을 극 중 인물로 택한 것은 우연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항소심을 앞에 둔 나의 기다림은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고도’입니다.


“세상에는 눈물이 일정한 분량밖에 없어. 다른 데서 누가 또 울기 시작하면 울던 사람이 울음을 그치게 되는 거야.”


작품 속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입니다.

‘고도’가 누구/무엇인지를 고민하다가, 지금 내가 울음을 그쳐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매일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울음은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고 합니다.

시인이 우는 것은 우는 사람들이 눈물을 그치게 하는 울림을 전해 주나 봅니다.  

   

안희진의 『시인의 울음- 漢詩, 폐부에서 나와 폐부를 울리다』 책을 받았습니다.

『우리 한시 삼백수』를 삼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끝을 봤습니다.


이제는 압록강을 건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을 거닐었던 굴원, 이백, 두보, 낙천 백거이, 동파 소식, 도연명, 왕유… 기대되는 이름들을 목차에서 먼저 만납니다.


아쉬운 것은 한자의 중국어 발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平)과 측(仄), 압운(押韻)을 알지 못해 한시(漢詩)의 맛과 멋을 감히 이해할 수 있을지가 한계입니다. 시인의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내 가슴의 울림의 파동을 헤아릴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는 ‘기다림’입니다.     


한시(漢詩)를 소개하는 책 모두를 읽은 것은 아니지만, 한시의 시작에 굴원(屈原)의 시(詩)를 거론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 봅니다. 기원전 전국시대 사람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시인입니다. 그러니 그의 시는 전설처럼 한시 역사에 시조(始祖)가 되나 봅니다.     


유명인의 유배는 조선이나 중국에서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장강(長江) 남쪽에서 추방자로 살아가던 어느 날 어부를 만나 서로 나눈 대화가 시(詩)로 남았습니다.

굴원은 세상의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는 결백한 삶의 의지를 말합니다.



新沐者必彈冠(신목자필탄관)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진의)
安能以身之察察(안능이신지찰찰)
受物之汶汶者乎(수물지문문자호)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冠)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데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어부가 노 저어가며 부른 노래입니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는 것이거늘



2천 년의 세월을 흘러온 노래(詩)의 이유를 끄덕일 수 있게 합니다.

굴원은 돌을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해마다 단오가 되면 중국인들은 굴원을 기린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갓끈을 씻어야 할지, 발을 씻어야 할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창랑의 물이 탁한지 맑은지의 판단이 나에게 있지 못합니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가 부처를 만납니다.
죽음을 앞두고 배신할 제자들로 인한 고뇌를 털어놓습니다.
부처는 예수의 손을 잡고 연못으로 갑니다.
탁한 연못물에 떠 있는 연꽃을 가리키며 예수를 바라봅니다.
예수는 말없이 탁한 연못물을 떠서 마십니다.



오래전 종로서적에서 나왔던 『석가와 예수의 대화』에서 읽었던 기억입니다.   

   

굴원과 어부, 석가와 예수의 대화는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대사들을 닮았다는 느낌입니다.


무엇하나 정의하지 않는, 알 수 없는 줄거리의 흐름에서 등장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독자가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당신의 인터넷 서신을 기다리고, 당신은 나의 편지를 기다립니다.

나와 당신이 서신과 편지를 더는 기다리지 않는 날을 기다리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나와 당신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 중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고도 보다 양치기 소년을 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차라리
내가
고도가
되는 날을
더더욱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이 답답한 것은 '언제, 언제'의 기다림의 끝을 알려고 할 때입니다.


기다림이 자유로우려면 그저 "여느 날과 같은 어느 날"이라고 가만두면 됩니다.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요!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는 날과 같은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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