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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16. 2024

창(窓)은/이 네모입니다

감옥에는 스위치가 없습니다.


점등과 소등의 자유가 수인(囚人)에게 있지 못합니다.

은밀한 잠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은 보호를 위한 감시입니다.

한밤을 볼지도 모르는 이를 위해 보여주며 가지런히 자야 합니다.


밤에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감옥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빗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감옥에서는 눈보다 귀가 먼저깨나 봅니다.

모두가 일어나는 시간까지 누워서 기다립니다.


귀가 깨운 눈을 떠서 올려다보면 작은 창문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지 눈으로는 보지 못합니다.

눈이 다 보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창(窓)은 네모입니다.


네모는 상하좌우로 반듯한 각(角)을 갖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의 전환이 반듯해야 네모입니다.

세상은 동서남북-좌우상하를 가졌지만 반듯한 각을 가진 네모는 아닙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반듯하지 못한 각들을 갖고서 남과 북으로 나누어 오도 가도 못합니다. 동과 서로 나누어 표 싸움이 패거리를 이룹니다. 학벌과 재벌이 상하로, 자기 합리의 온갖 이념이 좌우를 나누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창(窓)은 세상을 내다보는 틀이라고 합니다.



화가는 한 폭의 사각(四角) 캔버스에 자신이 본 세상을 그린다고 합니다.

사진가가 인화한 사각(四角)의 사진은 사진가가 본 세계를 찍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과 사진의 예술성에 그 선후를 가릴 수는 없을 겁니다.

있다면 시간입니다.


화가가 그려내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시간이 사진가가 순간의 찰칵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시간을 앞지르지는 못할 겁니다.

사진을 ‘순간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붓에 담은 화가의 마음과 렌즈에 담은 사진가의 마음을 각자가 보내온 세월의 시간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림보다 사진이 사실을 적시(摘示)한다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각의 틀 밖에 있는/던 것은 작가 말고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사진의 사각 밖에는 시간도 있습니다.

사진의 사각에 담긴 사진가의 시각은 사진가의 시간입니다.


찰칵의 순간 전과 후를 모르면서 한 컷의 사진이 사실의 증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포착(捕捉)은 활이 아니라 갑옷을 만드는 마음을 잡는 일이어야 할 겁니다.

작가마다 자신의 창(窓)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화가마다 시대마다 다른 그림을 이해하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동서양의 그림의 차이가 여백에 있다고 했습니다.

채우는 그림과 비워둠으로 그리는 다름입니다.

채우지 않아도 그림이 되듯이, 말을 다 하지 않는 것이 시(詩)라고 했습니다.

시와 그림이 있는 시화(詩畫)가 아니어도, 몇 구절만으로 그림을 그려 놓는 시(詩)도 있습니다.     


江雪(강설-눈 내리는 강) - 柳宗元(유종원)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逕人蹤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온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마다 발자취도 끊어졌네

배 한 척 위에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 찬 강물에 눈이 내리네     



짧은 글을 읽는 데 한 폭의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사각의 화폭은 온통 흰색입니다.

화폭 전체가 텅 빈(虛) 것으로 가득 채워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검은 점 하나 있습니다.


첩첩산중에 내린 눈이 온 산을 하얗게 덮어서 보이는 게 없습니다.

하늘길도 끊어져 새 한 마리 날지 않습니다.

산길마다 쌓인 눈 위엔 사람의 발자국 하나 보이질 않습니다.

찬 겨울 강물은 얼어서 하얀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한구석 위에 검은 점 하나 있습니다.


작은 배 하나, 도롱이에 갓 쓴 노인 하나, 낚싯대 하나, 이 모두도 검은 한 점에 모여 있습니다.

그 한 점 위에 눈물 한 방울 떨어져 시화(詩畫) 위로 번집니다.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첫 자(字)들만 이으면 천(千)·만(萬)·고(孤)·독(獨)입니다.

수인(囚人)에겐 세로로 먼저 읽히나 봅니다.

절(絶)과 멸(滅)로 끝을 맺는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도롱이를 걸친 옹(翁-노인)이 옹색(壅塞)한 수인의 모습으로 비쳤나 봅니다.


천만(千萬)이 절멸(絶滅)인 세상에서 고독한 수인(囚人)에겐 빗물이 밤새워 추적대며 내릴 것 같습니다.
절멸(絶滅)의 형기(刑期)가 그칠 동안 천만(千萬)의 세상이 하얗게 눈(雪)으로 덮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마지막 절구를 ‘겨울 강에서 흰 눈을 홀로 낚는다’라고 번역하기도 했답니다.

노인은 허(虛)를 담그고 공(空)을 낚는 한 점(點)입니다.

수인(囚人)이 할 일입니다. 


잠시 책을 놓고 허리를 세웁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면 마음도 바로 서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동파로 잘 알려진 소식(蘇軾)은 “이 시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늘이 준 경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짧다 못해 숨이 끊길 듯 단문(短文)을 쓰는 작가 김훈에게는 조사 한 글자마저도 그의 창(窓)을 보여줍니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 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로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김훈 『바다의 기별』 中     


영어에는 조사가 없습니다.

번역해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기대가 없는 이유 중 하나일 듯합니다.

 

한 문장을 쓰고 난 후에 다시 자신의 글을 되씹어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오타를 검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를 재검(再檢)하는 일은 고도의 자기 수행이 쌓인 결과일 겁니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을 통해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그런 자기 사고의 재검의 순환들은 필요해 보입니다.


김훈의 짧은 글에서 그의 순발(瞬發)을 보기보다는 휘발(揮發)되지 않는 존재의 무거움에 가라앉아 있는 필력의 세월을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창(窓)이 네모입니다.


수인(囚人)이 매일 보는 밖의 세상이 사각(四角)입니다.

사각의 작은 철창문으로 보는 세상은 가로와 세로로 녹슨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반듯한 사각은 오늘도 나의 사색의 각을 미리 점지해 줍니다.

 

뚫려 있는 사각의 창문은 빈 바탕화면을 갖고 있습니다.

밤이면 어두운 색으로 채워지고, 새벽이면 푸른색으로 번집니다.

하늘은 유화보다는 수채화가 어울리는 화폭 같습니다.

감옥의 철창문을 다 채우지 않는 화폭은 서양화보다는 동양화에 가깝습니다.

천천히 크게 숨을 들이켜면 그윽한 수묵화의 내음도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올려다보는 창문은 어제의 자리를 옮기지 않습니다.

화폭은 그 자리여도 그려지는 어제의 하늘이 오늘의 하늘과 같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곳을 올려다보지만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릅니다.


막힌 담에 뚫린 철창문의 바탕은 언제나 자유로운 하늘입니다.


검은색, 흰색, 푸른색, 파란색, 회색 다채롭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다른 모습입니다.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늘 같지 않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째깍대는 초침의 움직임조차 자주 보게 되는 수인(囚人)은
화가보다는 찰칵으로 살아가는 사진가를 닮아 보입니다.





“차이는 부분의 확대”라는 신 선생님의 말씀은 지난날의 많은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같아 보이는 것이라도 돋보기를 들이대면 차이가 확연해지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소한 다툼이 큰 싸움이 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멀리서 보면 하나로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차이를 ‘하늘(天) 땅(地) 차이’라고 하지요.

멀리 내다보면 하늘과 땅이 닿아있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너른 광야에 서 있지 못해서입니다.     


오늘이 형기(刑期)의 한 날이라면, 오늘이 출소(出所)의 날과 맞닿아 있음을 봅니다.


물이 끊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칼로 물을 벨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과 대양(大洋)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산객이 옹달샘 물을 마시면서 대양을 생각해 낼 수 있을 때 산 꾼이 될 겁니다.


밖과 안을 가르는 옥담이 내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기억은 옥담을 훨훨 넘나듭니다.

지금의 마음이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겨울 성산포 바닷가 갯바위에 앉았습니다.

소주잔 안에 차 있는 선을 수평선에 맞추고 들이켰습니다.

차디찬 가슴에 뜨거운 대양을 들이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야봉 일몰의 붉은 태양 아래 커피잔을 들이대며 쌍화차를 마신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엔 그동안 써오고 있는 공책들을 들춰보았습니다.

‘이걸 다시 쓰라면 정말 못 쓰겠다’라는 마음이 덜컥 들었습니다.

쓴 분량보다 살아온 날들을 다시 살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 장씩, 한 권씩을 넘기다 공들여 쌓아 올린 전탑(塼塔)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이지마다 빌고 비빈 손들이 들어있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마음처럼 공책을 무릎 앞에 쌓아두고 합장(合掌)을 합니다.



돌과 돌을 부딪치면 불꽃이 튑니다.

그렇다고 돌 안에 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꽃으로 밥을 지을 수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수인(囚人)은 일상이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도공(陶工)을 닮아야 할 듯합니다.     


매일 올려다보는 창문에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의 차가운 돌을 던집니다.

녹슨 쇠창살에 부딪혀 불꽃이 튀는 것이 보이면 글로 적습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글들이 쌓이면 당신이 겪는 추운 마음에 작은 모닥불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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