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절필동 Dec 29. 2023

꽃 지는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

화사수무영(花謝樹無影)

삶의 균형을 잃었을 때 오는 어지러움으로 쓰러졌던 날들을 기억합니다.




뱃멀미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가 배를 탄 것이고, 

둘째는 파도가 일어서고요. 

셋째는 파도에 배가 일렁인 것이며, 

끝으로 배의 움직임에 몸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어지러움이 일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지키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면벽(面壁)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미동(微動)도 없어 보입니다. 흔들림을 멈추면 어지러움을 그치게 하는 고요의 선정(禪定)에 들 수 있나 봅니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물도 떨립니다. 물은 사방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파동을 물 끝까지 밀어냅니다. 

떨림을 잠재우게 하는 물의 지혜입니다. 

물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물의 높고 낮음을 없애는 일입니다. 

잔잔하고 고요한 물은 평평합니다. 




차별(差別)은 차이(差異)의 분별(分別)입니다. 

평평함이 없는 어지러움입니다. 

감옥의 바닥은 평평합니다. 

분별의 어지러움을 잔잔하게 만드는 자리입니다.    

 

흔들림은 상대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작은 풀잎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큰 바위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것을 보았던 김수영은 크고 작은 것들, 세고 약한 것들의 분별을 흩트려 놓습니다. 

감옥에서 눕고 일어섬의 때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장마를 준비하듯 거센 비가 내립니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기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려라.” 


헤밍웨이의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의 「노인」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뱃멀미도 없이 숱한 날들을 넉넉히 기다려 그 물고기를 앙상하게 뭍으로 끌고 왔었지요. 내가 그 바다에 떠 있는 듯합니다.     



신 선생님이 감옥 방안에 햇볕이 들어온 모습을 글로 그려놓았습니다.


“창살 무늬 진, 신문지 크기의 각진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아 있으면 몸은 흡사 정다운 어깨동무처럼 포근히 목을 두릅니다.”



감옥에서 지난겨울을 보낼 때, 처음으로 보았던 이미지입니다. 자주 따라 했던 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종이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본다고 했습니다. 

종이를 만들어 낸 나무와 나무를 길러낸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질긴 연(緣)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바람에 흔들려 딸랑거리는 풍경(風磬) 소리에서도 그리움을 보는 이가 시인입니다(“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멋진 이미지와 한시(漢詩) 한 편 옮깁니다.


한 시인이 깊은 산 사찰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됐습니다.

한밤중에 밖에서 사찰 마당을 비질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방문을 열고 내다봅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찰을 대나무 숲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대나무 숲이 바람에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달밤에 대나무들이 흔들거립니다.

대나무 그림자들이 사찰 마당을 비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고 먼지도 일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채근담(菜根譚)의 시 하나를 떠올립니다.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풍래소죽 풍과이죽불유성)

雁度寒潭 雁去而潭不留影(안도한담 안거이담물류영)

故君子, 事來而心始現 事去而心隨空(고군자, 사래이심시현 사거이심수공)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소리가 남지 않고,

차가운 연못에 기러기가 지나가도, 

기러기가 지나가면 연못은 그림자를 남겨두지 않는다.

하여,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일고, 

일이 지나면 마음을 비운다.     



출소 후 가서 하룻밤 머물고 싶은 곳이 생겼습니다. 달이 차오른 날 대숲이 우거진 사찰에서 하룻밤 묵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손 쓸 수 없는 일’에 손을 뻗어 휘젓지 않으리라는.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해 줍니다.


‘진금부도(眞金不鍍)-순금은 도금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지만, 순금이 아닌 자기부정은 도금(鍍金)의 치장(治粧) 유혹을 피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수행은 도금의 과정이 아니라, 내가 금이 아닌 무아(無我)를 찾아가는 길이라 여깁니다.     


화사수무영(花謝樹無影)

‘꽃 지는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을 새롭게 읽습니다. 


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이 핀 것보다는 이제 꽃이 막 피어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피어난 꽃은 언젠가는 시들고 지게 됩니다. 

피어남이 기쁨과 행복이라면, 시들고 지는 것은 슬픔과 불행일지 모릅니다. 


흔히 고통과 슬픔은 어두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미지로 ‘그림자’를 떠올리곤 합니다. 

빛이 기쁨이고 그림자가 어두운 슬픔이라면, ‘꽃 지는 나무에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말은 역설(逆說)입니다. 꽃이 졌는데, 슬픔의 어둠이어야 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정설(定說)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가 있는 곳 가까이에는 빛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빛이 있어도 꽃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습니다.

아픔에 슬픔을 두지 않으면 고통을 견뎌내는 처방입니다.


이전 14화 가치(價値)와 마모(磨耗)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