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소위 <부사 없는, 삶은 없다>
오늘은 327면~329면까지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 본다.
현자는 우주만물이 한시도 같은 모습으로 머무르지 않는
그 이치에 기꺼이 순종한다
_키케로
내가 신에 대해 알고 있는 한, 나는 신이 이루시는 일은
우리에게 항상 최선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_에머슨
인생은 끝없는 기쁨이어야 하며, 또 기쁨일 수 있다
기쁠 때는 순수하게 기뻐하되, 기쁨의 원인이 사라질 때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다.
_파스칼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톨스토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문장이 오늘 나에게 닿는다.
한때는 죽음을 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평온해질 수 있다는 생각.
하지만 십 년 전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나에게 죽음을 두려움으로 느끼게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삶답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죽음이 두려웠다.
아이들이 너무 어릴 때 내가 아빠처럼 갑자기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두려움은 무기력한 나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단순한 일로 몸을 움직이며 부질없는 생각을 좇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조금씩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글쓰기와 독서였다.
요즘은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억울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다.
아직 감정의 파도가 일면 끝없이 밀려갔다 돌아오는 나지만 예전처럼 그 감정의 파도에 질식할 마음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삶에 미련이 남지 않기 위해 나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지내려 한다.
그래서 하루의 시작을 감사함으로, 하루의 마무리도 감사함으로 맺는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브런치스토리에서 알게 된 소위 작가의 책이 도착했다.
소위의 뜻은 "소소한 일상의 위대한 힘"
이름의 뜻을 알게 되니 작가가 쓰는 글의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것 같다.
처음 다른 작가의 댓글의 댓글로 서로를 알게 되어 이것도 신기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부사 없는, 삶은 없다>의 [어쩌면, 모든 게 다 오해였을지도 몰라]를 브런치북에서 읽었다.
순간 "어쩌면"이라는 부사가 내 마음에 박혔다.
며칠밤을 힘들게 했던 고민들은 "어쩌면, 모든 게 다 오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고 추스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나는 이 "어쩌면"이라는 부사로 영감을 받아 노랫말을 만들었다.
목차를 읽으며 숨바꼭질처럼 숨어있는 부사들을 본다.
그리고 "숨바꼭질"이라는 단어를 보며 또 놀란다.
내가 최근에 써둔 노랫말 주제어가 "숨바꼭질, 술래"였는데...
잠시 소름...
<부사 없는, 삶은 없다>라는 책 제목부터 나를 확 끌어 잡는 힘이 있었다.
글이 책이 되려면 자신만의 한 가지 큰 주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오늘 목차를 보며 읽기 시작한 부사는 "지금"이었다.
출판 공저를 포기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의 "지금"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다.
작가도 힘들었던 젊은 시절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책을 만났다고 한다.
힘든 순간마다 마법의 주문처럼 자신을 붙잡아준 그 문장.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읽다 보니 작가와 나도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존재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
지금은 많이 벗어났지만 그래도 그 고통이 내 생의 절반에 가까운 지금까지도 발목을 잡는 걸 보면 어린 시절의 무조건적인 부모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무력하게 침대에만 누웠있던 내가 지난 6개월간 글을 쓴다고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찌 보면 또 다른 회피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한다는 핑계, 나를 성장시키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워있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나만의 세계에 나는 갇혀 있었다.
살림도 엉망이고 주변은 어수선하고 가족들끼리는 여전히 물 위의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한테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의 회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상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더 대화하는 것, 아이들을 위해 저녁밥을 차리는 것, 아이들의 고민들 들어주는 것, 한 번 더 안아주는 것,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는 것.
내 삶이 바로서질 못했으니 아이들에게 쓰는 글에 진심이 담길 리 없었다.
글이 아니라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엄마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
나는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공저 글도 쓰고 가족도 회복하는 둘 다를 하면 되는 것이지 왜 포기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나약한 정신도 맞고 비겁한 변명도 맞다. 그런 나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게 나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쓰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글은 내 삶을 살아가면서 한 줄씩 완성해 나가기로 한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