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60일 차] [망가지기 쉬운 천사들]
프랑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읽는다.
에세이와 짧은 소설을 오가는 듯한 문장의 흐름에 주춤하며 밑줄을 긋는다.
간결한 문장, 섬세한 문체가 아름답게 눈과 마음에 덧대어진다.
삶에도 오직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날이 선 피투성이 문장. 빛이 사라진 헐벗은 심장. 신경을 두드리는 잉크의 비. 이 언어가 현기증을 일으킨다. 영혼의 우물 속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당신을 당신 자신의 어둠 속에 난데없이 데려다 놓는 한 줄기 빛처럼, 이 문장들이 당신 안에 울려 퍼지자 심연이 입을 벌린다." (50면)
너는 내 안에 깃든 사랑한다는 동사의 보어야.
직접목적보어지.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너는 모든 것의 보어야.
"너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얼굴인 황금가면이야. 어린 나를, 배고파 우는 아이인 나를 어머니처럼 굽어보는 그림자지. 땅과 우주를 지배할 지고한 권리를 지닌 나는 무엇보다 너에 대한 권리를 비참하게 부르짖는 어린아이야." (52면)
부부란 대체 뭘까.
열정은 뭐고
사랑은 뭘까.
"집에 다다르기 전, 그러니까 5분 안에 해답을 찾아낼 것. 결국 게임 종료 직전에 당신은 답을 발견한다. 부부란 김 빠진 삶의 장이고, 열정은 분열된 삶의 장이다. 그런데 사랑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이제 당신을 당신의 집 문 앞에 선 채로 웃음을 터뜨린다. 이 참담한 발견에. 이 모든 한심한 정의에 경의를 표한다". (55면)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을 읽으며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세상에는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과 단어들이 존재한다.
분명 뜻은 알고 있는 듯한데 그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지,
흐릿하기만 한 나만의 정의는 그 단어를 내 안에서 꺼낼 때마다 낯선 언어를 보듯 갸우뚱하게 고개를 꺾게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나의 언어, 문장에 남몰래 움츠러든다.
열정이 뭘까?
사랑이 뭘까?
사랑이 빛바래 지면 정말 김 빠진 탄산수처럼 아무도 마시려들지 않게 되는 걸까?
내 안에 저장해 둔 묵은 단어 "사랑"은 어떤 상태일까?
유통기한이 적혀있지 않은 그것은 누굴 위해 남겨둔 것일까?
그 뚜껑을 여는 순간, 공기 중에 터져 나올 것은 톡 쏘는 인생의 환희일지,
김이 빠져버린 탄산수 같은 서글픔일지 궁금해진다.
한 때 내 삶을 관통했던 '너'라는 보어는 어쩌면 '나'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른다.
수십 번의 계절을 지난 너는 어떤 명사가 되어 어느 부사를 품고 내 옆에 남은 걸까.
김 빠진 삶의 장에서
무력감에 잠식된 나의 심장에
소리 없이 너는 말한다.
그럼에도
묵혀둔 씨앗, 이제는 미루지 말고 심어 보자고.
그리고
잊혀진 씨앗, 오늘은 내 안에서 찾아 심어 보자고.
나는 내 삶의 주어이자 보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