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8. 다른 세계에서 온 새엄마에게
어머니가 별이 되시고 내게는 아빠가 아빠이자 엄마였다. 그러곤 딱 스무 살 성인이 되어서야 새어머니가 생겼다.
새어머니라는 단어 자체부터 이질감이 있다.
새-어머니
사전적 의미로는 아버지가 재혼하여 새로이 아내를 맞이했을 때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차라리 이 단어가 없이 외국처럼 이름을 불렀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이 사라! “)
단어가 주는 이질감에 더해
이미 가치관과 성격이 확립한 상태에서 어머니란 존재를 맞이하는 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며 어색함을 넘어 앞으로 맞이할 모든 날들이 낯설고 불편할 미래를 예고했다.
처음엔 그냥 낯설어 싫었다.
이후엔 다른 방식으로 힘들었다. 타인의 눈에는 새로운 가족은 ‘소수’에 속해 많은 배려와 돌봄의 대상이었다. 친척과 주변 어른들은 이미 성인 여자인 내게 처음 만난 낯선 여성을 ‘엄마’라고 부르게 강요했고 그 과정은 내 마음에 여전히 폭력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다.
“아줌마라 대우하면 쓰나. 못 배운 사람 같아 보인다 “
“아줌마라는 말을 엄마가 들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니?”
“네가 잘해야지. 아버지 네가 평생 모시고 살 수 있니? “
그렇게 약 1년 후에나 불편하게 떼 본 “엄마”라는 말에 새어머니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라고 하셨다. 새어머니는 그때 아버지와 관계에서 불만으로 집을 나가려 하셨다(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시기 집에 방문한 부모님 지인, 친척들은 내게 ‘엄마’라 부르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라면서 호되게 그 자리서 혼을 내듯 말했다. 그때 빙긋이 웃으며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는 새어머니를 보며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새어머니가 한 말을 할 수도 없으니 무척 억울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지금은 새어머니와 약 10여 년 넘게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운도 바뀐다는 데 여전히 불편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버지 배우자로서는 인정했지만 꼭 내 어머니가 될 필요는 없는데 무리하게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탈이 난 듯하다. 여전히 체기가 있다. 그리고 새어머니 역시 이제는 내게 딸로서 기대하는 바가 하나하나 늘어간다. 자신의 자잘한 병원 업무부터 물품 구매, 어버이날과 생일날 챙겨주기를.
이전엔 여러모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줬다. 왜냐면 그래도 가족이니까.
그런데 남보다는 잘해주지만 엄마가 되기에는 너무 나는 커버린 채 만났고 마음의 간격은 줄이려 할수록 더 벌어졌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독립해 사는 나의 반찬을 걱정해 주며 내 김치를 챙겨주시고, 안부를 물어주시며 때론 여행 가서 내 생각이 나 선물을 사 오는 새어머니는 분명 먼 ‘아줌마’는 아니다.
그러니 요즘은 새어머니와 경계를 새로 세워 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연인이며 고마운 새로운 인연이다. 그러나 나 역시 소중하니까. 내가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너무 멀지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적어도 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해도 미워하지는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