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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주 May 24. 2024

멈추고 비움, 배움 그리고 채움

아름다운 선순환이 불러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다

  나는 한때 미니멀리스트였다. 지금도 역시 마음만은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 도미니크 로로의 [나는 심플하게 산다]를 읽고 금세 사랑에 빠졌고 온 집안을 뒤집어 놓은 후 버리기 시작했다. 물건을 사는 기쁨보다 버리는 홀가분함이 좋아 끝도 없이 비워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비어있던 자리는 다른 물건으로 채워지고 누구에게도 심플하게 산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퇴사 후 1년이 흐르고 나는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다시 비움에 집중하게 되었다.

멈추고 나니 비로소 사지 않고 사는 삶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


  서랍을 뒤집어엎어 보니 가득 차서 넘쳐흘렀던 소유물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흐트러진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살리는 건 왼쪽 하얀 바구니, 버리는 건 오른쪽 검은 비닐봉지.

서랍 하나 정리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다. 정신적 에너지도 쏟는다.

그런데 유심히 보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오는 게 있다. 물건도, 사진도, 추억마저 보류 판정을 내리고 중간 회색 가방에 담는다.

정리의 달인이 말했다. 꺼내고, 버리고, 남길 것만 다시 담는 것이 기본임을 강조했다. 추억이 깃들어 애매한 것들은 사진으로 남기고 그 또한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보류된 것들만 모아서 가방에 담아두었다. 마음이 이끄는 날 다시 꺼내보고 반복하겠지. 떠나보내거나 마음이 바뀌어 살리거나, 또 망설여지면 가방에 다시 넣어둘 테지.


"나는 물건을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결국 눈에 보이는 물건을 치우고 정돈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은 내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가벼워지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깨끗해진 집안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지고, 비워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발걸음마저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가 있으므로.


  출근하지 않는 삶이 주는 시간의 여유로움을 글쓰기로 채우니 영혼이 위로받는다. 막혀있던 명치는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니 숨통이 트여, 먹고 싶은 음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운다는 것은 배움을 불러일으켰다. 퇴사 후 6개월은 조용히 침잠하는 시간이었는데, 자책이 가라앉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림에 다가가고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다. 전반전은 비움의 시간이었다면, 후반전은 배움의 날들이 이어지더니 또 다른 나로 채워져 가고 있다.


 비우기 위해 몸을 챙기기 시작했고 자연식에 관심을 두게 되니 '비건 페어'라는 전혀 다른 세상에 가서 기웃거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움, 배움, 채움.

 그리고 다시 비움.


  앞만 보고 달리던 때에 언제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니 채우려고만 했다.

대부분이 물건이었고, 멈춰 서서 생각하는 지금이 오기 전에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사유하는 시간을 채우고, 영혼을 돌보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마음의 체기가 가라앉지 않을까.


  결국 마음의 비움이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여 가슴 벅차게 채워질 때 나는 살아나게 되는 거니까.

다시 일어설 수 있기까지 순리대로 비우고, 배우고, 채우기를 반복해 나갈 것이다. 끊임없는 순환이 인생의 흐름이라면 나는 그 과정 속을 걸어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더라도 숨을 충분히 고른 뒤에 천천히 나아가보자. 너무 차올라서 버거워지면 그때 또 비우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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