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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주 Jun 07. 2024

새로운 시작을 비추는 빛

'이렇게 일만 하다가 끝이 나겠구나.'

그땐 그랬다.


나 한번 봐주세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는 게 맞나요? 이뻐해 달라고 말하지 못하지만 나도 이쁨 받고 싶어요. 싫은 소리 한번 내뱉지 않았어요. 그러면 나를 싫어할까 봐.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절대로 NO를 말하지 않았거든요. 덕분에 인생은 꼬이고 숨 막혀서 도망쳐 나왔네요.

아, 근데 억울하네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정하고 싶지 않네요. 그곳에서 나는 그저 잠시 끼워서 맞춰진 부품이었다가 쓸모를 다하면 무가치해진다는 것을.

그런데도 행여 누가 내 자리를 밀어낼까 봐 전전긍긍하며 다람쥐 통을 굴렸어요. 죽어라 굴리면 티가 안 나는데, 잠시 멈칫하면 삐그덕거려요. 한낱 부품에 불과한 내가 주인의 허락 없이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니 혼자만 떨어져 나가 튕겨버렸네요. 어디서 나왔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멀리.

그렇게 멀리 날아가 흙바닥에 던져지고 나면 그제야 멈추게 돼요.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 힘이 생기고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사막이네요.

이건 뭐 죽으라는 거죠.

볼펜 한 자루 챙겨 나온 게 없는데 이젠 어떡하죠?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왜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면 나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간절했다.

일하는 내내 나의 능력을 의심했고 불안했다.

끝을 내고도 원치 않은 시기에 나왔다는 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질책했고

자책했다

끊임없이 책임져야만 했고

팀장의 역할마저 떠맡았고

참아내는 게 익숙해지자, 그것은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그곳을 벗어나도 나의 선택에 대한 무게가 짓누르고 있었다.


내 인생의 설국열차.

어린 시절 꼬리 칸부터 차근차근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갔는데

마지막 칸을 앞두고 뛰어내린 느낌이었다.


다시 시작하려면 꼬리 칸부터 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그동안 타고 있던 열차는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는 성공 열차이기에 승진 만이 의미가 있었다. 그나마 내게 줄 수 있는 보상이었다.


그런데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죽을 만큼 버티다가 진짜로 떨어져 보니

드넓은 들판에 고요함만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다음 열차 오는 시각이 울리는 데 언제 다시 오를지 선택권이 주어진다.

용기 있게 뛰어내린 사람에게만
기회의 선물이 다가왔고
두 손 가득 움켜쥐었다.


다시 올라타고 싶지만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본다.

저 멀리 뛰어노는 아이의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이고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 본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난 후 본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제 거울을 보며 나와 눈 맞춤을 시작한다.


새로운 열차에 오른다.

순서대로 앞 칸으로 나아가는 설국열차는 선택하지 않는다.


자리에 앉으면 샴페인 한잔으로 긴장을 풀고

피아노 칸이 중간에 들어 있는 완행열차를 탄다.

밖이 궁금해지면 중간에 내릴 수도 있다.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물 흐르듯

바깥 풍경이 통창을 넘어 푸르게 펼쳐진다.


유연해지면 나의 시선 또한 좌우로 편안하게

가끔 위도 올려다보고 때론 발아래도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어느 열차에 타는 게 중요한가

어디에 사는 게 중요한가

요즘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지금 여기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부모도 어린 시절 친구도 없는 이곳

이제 출근하는 직장도 없는 이곳

그렇다면 어디서 살고 싶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멀리서 보면 나의 퇴사는 비극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내겐 축복이었음을 이제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공무원을 그만둔 것이 잃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17년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긴 시간이 내가 무엇을 진짜 원하는지 알아가는 시간이었음을.


계획대로 오십이 되어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며,

나의 젊음이 감사함을 느낀다.

'퇴사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후회 없다고 했으나 아쉬움이 남았고 이유 없이 우울했으며 미련 없다고 부정했지만, '완벽하지 않은 때'에 사로잡힌 나는 분명 지독히도 공허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과거의 설국열차는 떠나보냈다.

하마터면 내리지 못할 뻔했고, 불행하게 뛰어내린 듯했지만 내 인생 완행열차를 타고 그토록 간절했던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번아웃으로 타들어 가던 심지는 희미하지만, 새로이 일어나는 작은 불씨를 휘감아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나아가보자.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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