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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주 May 17. 2024

그저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길 위에서 꿈을 꾸다

  " 어쩌면 제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두 번째 독서 모임을 하던 날, 나도 모르게 이런 소감을 말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떠났고 날마다 걸었으며 걷고 나니 그 길의 끝에서 달라져 있었노라 전해주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막연하면서도 어렴풋하게 마음을 맴돌았다. 순례라는 단어가 주는 경건함이 좋았고 내 생에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스페인의 이끌림이 오묘했다.


  [네 번째 순간, 스페인]의 송준호 작가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길을 걷는 이유"와 "꿈"에 대해 질문을 한다. 천천히  들어주고 자세히 들여다본 마음에 대해 하나씩 전달한다. 저마다의 상실이 주는 아픔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것 같고, 소박하지만 소중한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슴을 울려 자꾸만 울컥하게 했다.


 '그렇다면 나의 꿈은 무엇일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안고 오늘도 길을 나선다. 두 발로 움직이는 일, 그저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모르는 이들을 힐끔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그러다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흐뭇해지는 산책의 시간을 보낸다.

퇴사가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자 무용한 아름다움이다.


  애정하는 벚꽃이 떠나간 자리에 철쭉이 알록달록 피어있던 어느 날엔가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며 혼잣말한다.

' 어떻게 찍어야 이쁘게 나올까나'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 한 분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은 나뿐이다.

순간 어색했지만,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한 장에 담기지 않는 꽃밭을 찍으며 나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자연스럽게 같은 공간을 거닐다 눈이 마주쳤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언덕에 핀 꽃을 담을 수 있도록 동영상 찍는 법을 알려드렸다. 얼핏 보아도 80세가 넘어 보여, 버튼 하나하나 설명해 드렸다.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챙겨드리고 돌아서는데 "고맙다"라고 하신다.


  " 이렇게 예쁜 걸 담아가니 집에 가서도 봐야겠다"며 꽃보다 어여쁜 소녀가 되어 행복해하신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걷기 전의 나와 걷고 난 후의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날마다 작은 에피소드가 쌓이고 오고 가는 이들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서로의 배경이 되어 외롭지 않다.

마주 오는 이의 다부진 결심이 느껴질 땐 나도 의욕이 생긴다. 거르지 말고 걸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하다.

앞서가는 이의 힘에 부치는 걸음이 보이면 나도 속도를 늦추고 앞지르지 않으려고 한다. 애써 힘을 내어 걷는 이에게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이다.

앞에서 보는 얼굴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뒷모습은 그의 지나온 인생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위로가 된다.


  최근에 맨발로 빗자루를 들고 쓱싹쓱싹 쓸고 있는 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낸다. 지난가을에 떨어져 이불처럼 덮여있는 나뭇잎들을 좌우로 비켜내고 있다. 한 걸음씩 옮겨가며 빗질로 길을 만드니 그 길은 새로운 흙길이 되어 맑은 황토색이 빛을 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와닿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쩜 이토록 새로울까? 30분 남짓의  동네 산책로에서 매일 옷을 갈아입는 자연을 보고, 느끼고, 사람 냄새를 맡는다. 날이 맑아서, 바람이 시원해서, 나무 그늘이 좋아서, 어제 보지 못한 꽃잎이 반짝여서

나는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그곳이 어제와 닮았으나 같지 않음을 느낄 때, 나 또한 어제보다 한걸음 나아갔음을 깨닫는다. 오늘의 산책은 내 마음의 일기장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 길 위에 계속 거닐고 싶다.

무해한 자연에서 살고 싶고, 하루치의 진짜 노동으로 무언가를 일구어내고, 나머지 여유는 누군가의 마음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더 나은 길을 가고자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길을 잃을 때가 있었다.

막다른 길은 아니었지만 뒤돌아 서서 다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선택의 고통이 힘겨웠다.

하지만 오늘 선택한 길 끝에 가보지 않은 길이 맞닿아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결국 하나의 길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앞으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미 가본 길이어도, 때론 새로 난 길이어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걸으면 알게 되고

알고 나 다른 내가 되어

한 뼘 더 자라나는 것이다.


어제의 나를 끌어안고

오늘의 나를 믿어주고

내일의 나에게

이윽고, 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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