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틀이나 흘렀다. 여전히 보글보글 곰탕이 끓고 있다. 어린 내가 쏘옥 들어갈지도 모를 커다란 은색 냄비가 등판했다. 가을이 저물고 올겨울 타자가 들어선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냄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프로야구 경기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노장의 묵묵함이 떠오른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주방이 안개구름으로 가득 찼다. 겨울이면 익숙하게 보아 온 집안 풍경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곰탕 없는 추위는 견디기에 어려웠다. 뜨끈한 국물을 좋아하는 가족들을 위해 각각의 뚝배기에 국을 덜어서 데워낸다. 식탁에 앉아서도 잠시 뜸을 들여야 펄펄 끓던 방울들이 뽀얗게 정돈된다.
이때다. 미리 준비해 둔 소면을 살포시 넣어 휘이익 저어주고, 자그마한 파를 송송 띄운 후 소금 살짝, 후추 톡톡 얹혀주면 엄마의 곰탕 한 그릇이 완성된다.
아빠와 오빠 그리고 나, 세 식구가 빈속을 채우는 동안 엄마는 멀리서 우리의 표정만 들여다본다.
숟가락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다가
"음~ 이거지." "아, 찐하다."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오면 그제야 합격 통지표를 받아 든 엄마가 주방을 떠난다.
20대에 엄마를 뒤로한 채 부산을 떠나 결혼과 취업, 곧이어 육아를 동시다발로 이어갔다. 처음 부천에 발을 딛고 그해 겨울 첫 출근을 하던 날,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빽빽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은 마냥 가벼웠다. 그러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눈 없는 겨울이 익숙했던 나에게 이곳의 칼바람은 뺨을 베이는 듯 날카로웠다. 10년째 되던 해에 직장이 가까운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그렇다고 겨울이 달라진 건 없었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던 나는 엄마의 곰탕을 찾아 헤매었고 수없는 가게를 전전했으나 도저히 발견하지 못했다. 설렁탕이라도 대신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무 거리가 멀었던 것일까. 고향 냄새 비슷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리움만 짙어졌을 뿐 그 맛을 찾아내는 일은 서서히 포기되었고 기억 저편으로 흐려져 가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홉 살이 되고 겨울방학이 길어져 엄마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 조마조마하던 일주일을 보내고 부산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의 곰탕이 눈앞에 등장한다. 나도 아이도 그릇에 빨려 들어가듯 한 그릇씩 뚝딱 해치워 버렸다. 배를 채우고 나니 옆에 앉아서 지켜만 보던 엄마가 눈에 들어온다.
" 아이고, 며칠 전에 끓여서 혹시나 먹여봤는데 어쩜 콩만 한 애가 삼시 세끼를 이것만 먹더라." 감출 수 없는 기쁨에 엄마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곰탕을 또 먹고 싶다는 손녀의 말을 들으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그 얘기가 나는 왜 이다지도 먹먹하게 느껴지는지, 혼자 울컥한다. 눈물 버튼이 고장 날까 봐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엄마도 같이 먹지. 왜 안 먹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뗀다.
"나는 원래··· 곰탕을 싫어해."
아, 이게 무슨 말인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시간을 거슬러 어렴풋이 지나쳤던 장면 속에 엄마는 곰탕 앞에 앉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덜커덩 가슴에 내려앉는다.
이제야 알아챘다. 나는 한 번도 엄마에게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지 않았고, 곰탕을 차려주고는 항상 어디론가 집안일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도 오래되고 자연스러워 내가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른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어른의 세상에서 되도록 티 나지 않게 의젓한 척 살아내다가 고향에 갈 때면 철부지 어린아이로 돌아갔고, 무려 40년이 넘도록 오직 한 사람의 희생으로 깊어진 음식을 먹어 온 것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뜨끈한 뚝배기는 식사하는 내내 온기를 품고 있다. 옆에서 지켜봐 주는 엄마의 마음처럼.
"엄마는 뭐가 맛있어? 내가 해줄게."
난생처음 내가 먼저 물어보았다.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하는 마음의 울음은 삼켜내고 최대한 담담한 척 용기를 내었다.
"글쎄, 아무거나 상관없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메뉴를 고민해 보지 않아서일까.
짧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다.
한참 뒤에 정말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사실 나는 잡채가 좋은데, 나한테는 안 해지더라. 그래서 내가 잡채를 못 먹어." 괜히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둘러대며 또다시 주방을 떠나는 엄마.
그 말이 내게는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잡채가 너무 먹고 싶어'라는 간절함으로 들렸다. 다가오는 이번 생신날에는 집채만 한 잡채를 한 아름 안겨주고 싶다. 그리고 자꾸 물어봐야겠다. 어떤 게 먹고 싶은지 질문을 하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보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곰탕처럼 내 딸의 잡채가 당신의 가슴에 고이 담겨 춤출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변치 않는 사랑 표현은 음식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희생과 정성이 가슴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움직이게 하고, 나를 살아있게 하며 대체할 수 없는 원동력으로 살아갈 날들을 이끌어 간다.
나의 고향이자 그리움의 원천, 엄마의 곰탕을 뛰어넘어 모든 엄마표 음식은 지금껏 나를 살려낸 것이다.
오늘 아침에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영을 배우러 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다가 제철 나물을 버무려 먹는 레시피로 마무리된다. 엄마의 특기는 '살리기'이다. 당신이 그래온 것처럼 내가 나의 가족들을 음식으로 살려내기를 염원한다. 포기란 없다. 20년 전 시집보낸 딸에게 꾸준히 전화를 걸어 오늘의 식탁을 연결한다.
엄마의 사랑 언어는 '음식'이었음을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다. 다정한 포옹 한번 없었던 엄마를 서운해했던 내가 미워지는 오늘이다.
곧 딸아이가 집에 올 시간이 다가온다. 엄마에 의해 살려진 내가, 곁에 있는 가족을 살리는 음식을 하러 주방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