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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주 Apr 19. 2024

나의 다정한 이웃사촌

혼자인 것 같아 주변을 돌아보니 그곳에 함께였던 우리

  '제발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오늘도 마음속으로 투덜거린다.


  9년 전에 이사를 오고 나서 한꺼번에 동네 이웃이 생겨버렸다. 남편이 꿈에 그리던 사회인 야구를 시작하면서 단조로운 주말연휴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는 강가에서 한발 두발 저어가며 오리배를 타던 우리였는데, 이리저리 정신없이 떠내려가고 온몸이 흠뻑 물폭탄을 맞으며 브레이크 없는 래프팅을 이어갔다.


  혼자가 편했던 나는 혼자일 수 없어서 불편하다가도 다 함께 왁자지껄 보내는 시간들이 재밌어졌다. 차려입지 않고 집 앞에서 언제든지 만나는 사이가 익숙해져 갈 즈음, 가까운 거리만큼의 서운함이 스며들었고 미묘한 감정소모로 인해 먹구름이 뒤덮였다. 모두가 하나였다가 하나 둘 마음 맞는 이와의 시간이 쪼개지면서 시들해져 갔다. 어느 날 우연인 듯 운명인 듯 한 곳으로 이사를 와서 가족보다 자주 보는 이웃이 되었는데, 서서히 마음의 온도가 떨어지고 하나 둘 떠나가며 희미해져 갔다.


  다섯 식구가 똘똘 뭉쳐있다가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 다른 보금자리로 이사를 마쳤다. 두 달 전 마지막으로 이사를 간 언니가 모두를 초대했다.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조금은 어색해졌고 저녁자리에 모여 앉아 다소 엄숙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저마다 아이들의 소식을 전하며 마치 새 학기 학부모 모임을 하는 듯하다가 오래전 속초여행 이야기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풀어졌다. 둘도 없는 절친들과의 뜨거운 여름날, 흥겨운 열정이 타올랐으나 여행지에서의 투닥거림은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서로에게 서운함을 남긴 채 끝을 맺었다.


  분명 나의 기억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들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싸우게 되었는지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낸 건지 기억 소환에 들어갔다. 택시 안에서의 숨 막히는 설전을 얘기하다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 네가 거기 있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나는 그날의 잊지 못할 택시 에피소드를 술술 풀어내어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확인이 아니다. 같은 시간 속을 함께 한 이들의 제각각으로 기억된 일기장이 뒤섞인다.


  새벽 2시를 향해가는 동안 수많았던 오해와 섭섭함이 툭툭 튀어나오다가 이미 지나간 시간들에 안녕을 고하며 너그러운 이해로 마무리되었다. 투닥대는 것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너와 내가 간직한 추억은 뒤죽박죽이었지만 나름의 이유로 의미 있게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며칠 전에 받은 꽃꽂이 수업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선생님이 강조한 것은 어울림이다. 각기 다른 모양과 향을 지닌 꽃과 풀잎들이 모여 하모니를 이루는 것. 반드시 달라야 한다. 같은 꽃이 여러 개 있으면 길이를 달리해서 잘라서 사용한다. 높낮이를 통해 어느 하나 가려지지 않도록 배치하는 것이다.  얼굴이 큰 꽃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작은 꽃들이 있어야 돋보인다. 작은 꽃들은 초록의 잎들이 받쳐주면 은은하게 빛을 낸다. 꽃다발을 한 아름 품고 길을 나서는 데 선생님이 귀띔한다. 조금 시들어 가는 듯하면 하나씩 뽑아서 각자의 꽃병에 꽂아두라고 한다. 그렇게 한송이를 들여다보면 그 또한 너무 아름답다는 말을 한다.


  나의 다정한 이웃이 우연히 한 곳에 머물며 어우러졌다가 이제는 다시 각자의 꽃병으로 돌아갔다. 고유의 빛깔이 있었기에 똑같은 향을 내지는 않았지만 다름 속에서 하나가 되었고, 이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각자의 밭에서 자라날 것이다.

  우린 또 이렇게 가끔 마주하며 기억소환을 하겠지. 얼굴 붉히던 그때의 무거움이 흩날리는 벚꽃처럼 하늘로 날아간다. 추억의 온기가 달아올라 더없는 가벼움으로 사뿐히 번져나간다. 그해 여름, 뜨겁게 달아올라 무르익다가 서서히 식어버리기도 했던 우리였지만 결국엔 다시 따스해지는 봄바람처럼 가슴 한편이 먹먹히 차오른다. 그리고 속삭여본다.


'제발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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