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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주 Apr 12. 2024

나의 오늘을 쓰는 하루

그곳에서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직장의 껍데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내 이름을 잃어버린 적은 없다고 자신했다.

명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근무하는지, 사무실 연락처까지 공개 대상이었기에 나는 그곳에서 "나로" 존재하는 줄 알았나 보다.

 

  퇴사 후 어느덧 8개월 차에 접어들고, 나는 글쓰기 수업에 문을 두드린다.

지난 일기장 그 어디에도 없던 버킷리스트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쓰는 하루>의 공간은 운명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첫 수업을 가는 길에 오랜만에 명치 통증의 강도가 높아졌다. 계획서를 고쳐 쓰던 때와 맞먹는 고통이다. 가는 내내 후회를 한다. 부담감이 차오르자, 입이 바싹 말라갔다.

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어색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가 빈자리를 살피는 나에게, 선생님이 첫인사를 건넨다.


  " 은주 님은 여기 앉으시면 되겠어요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마지막에 들어온 나를 수강생 명단에서 짐작한 것이다.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첫 수업을 시작했다.


 은주 님은... 은주 님은...

그 말이 귓가를 맴돈다.


  " 저는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아서요. "

선생님의 투명한 친절함이 가슴에 와닿는다.

순간 깨달았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온전히 나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을.

묘하게 온몸을 감싸는 온기는 감사함이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진짜 내 이름을 불러주어서 그랬을까?

천천히 긴장을 풀어내고 그때부터 직장에서의 압박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각자의 자리에 놓여있는 소개 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 누구나 작가가 되는 곳 >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신나게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름을 찾은 것과 끈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글이 쓰고 싶어서 갔는데 글이 쓰고 싶지 않은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이어진다.

그냥 쓰면 될 것 같은데, 아무렇게 쓰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글쓰기 수업은 시작되었으나, 나의 글쓰기는 출발선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수년간 들어가리라 다짐만 하던 서재를 뒤집어 놓았다. 책상의 방향과 책장 위치를 과감히 옮기고 독서대를 중앙에 놓았더니 더할 나위 없다.

은은한 배경음악을 위해 스피커를 준비한다.

딸아이의 노트북도 빌렸다.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두었다.

자, 이제 진짜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마감까지 미룬 숙제를 전날 밤에 겨우 끝내고 다음 수업을 가게 된다.

나는 또 고민에 빠지게 된다. 직장을 다닐 때는 일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취미를 이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번에는 핑계가 없다. 업무가 넘쳐서? 아이가 어려서? 시간이 부족해서?

아니, 출근이 사라진 나의 일상은 다른 건 다 잃어도 시간만이 넘쳐났다. 명백한 사실이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의지 부족이다. 생각보다 글 쓰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던 나에게 포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주려고 왜 안되는지 이유를 찾아냈다.

' 그래, 이건 안 맞는 거야 '

다른 걸 찾아보자.


  어라? 자고 일어나니 생각이 바뀐다.

'아니야,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잖아. 긴가민가할 때는 가보는 거래'

그렇게 <글 쓰게 기초반>을 마치고 <에세이 기초반>에 한 번 더 다가간다.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글쓰기로 '좋아요'를 받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고통이 쓰고 싶어 졌고,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뭐라도 되어야 했고 우아한 작가 타이틀이 부럽고도 아름다워 갖고 싶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는 걸 자책하면서도 끝을 알기 위해 <에세이 정규반 수업>까지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 가지 희망적인 건 한 번만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지난 12월에 시작된 수업이 새해를 맞이하고 4개월 차에 선생님의 애정 어린 피드백과 함께한 동료들의 합평으로 나의 에세이 3편을 완성했다.

그리고 혼자서 조용히 꿈꾸던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걸었다.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비법이다.


그토록 힘겹게 하나의 문을 닫고 돌아 섰더니

뜻밖의 글쓰기의 세계가 다가왔다.

인생 제2막인지, 중반부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나의 오늘을 쓰는 하루가 한 장씩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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