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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평야의 추억

지평선 김제평야

by 윤기환

끝이 없는 들판이 펼쳐지고, 누런 황금물결 넘실대는 지평선이 살아 숨 쉬는 곳. 김제평야 한복판에 내가 서있다. 문득,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열차 하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달려오고 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두어 살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용산에서 출발하는 여수행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완행열차는 술을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르는 일은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경쟁하듯 술을 마시며 떠들어댔다. 서서히 목이 쉬어갈 무렵, 언뜻 차창을 보니 이제 막 먼동이 트면서 짙게 드리워진 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판이 드러나고,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마을들이 언듯 언듯 차창을 스쳤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창가에 몰렸다. 우리들 눈앞에 펼쳐지는 지평선은 어느 선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신비로웠다. 나는 짐짓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차창으로 펼쳐지는 신세계에 빨려 들었다.


사십여 년이 훌쩍 흘러버린 오늘, 그때는 바라보기만 했던 이곳 지평선 김제평야 황금벌판을 거닐고 있다. 오늘 나를 품은 이곳이 김제평야라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것은, 그때 그 짧은 순간의 황홀경을 내 가슴 깊이 고이 접어 간직하고 있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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