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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빛을 따라 흐르는 강: 화이트(White)

<삶의 한 순간을 - 함께 사는 세상> 겨울 이야기

by Kyrene Jan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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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근교 겨울 풍경  © Kyrene






갈래머리 여고생 시절 우리 둘의 약속, 겨울이면 어김없이 떠오른다. ‘첫눈이 내리면 ◯◯ 공원 입구에서 만나자.' 두툼하고 샛노란 은행잎에 조심스레 적어 보물처럼 나누어 가졌다. 성인이 되어서도 책갈피에 간직했던 빛바랜 추억의 은행잎. 흑단(黑檀) 같던 머리에 백설(白雪)이 내린 우리.


▲  눈 덮인 연못 거위 가족 나들이  © Kyrene


유난히 눈이 많은 미국 동부의 깊은 겨울밤, 주택가 작은 도로에서 제설작업이 계속된다. 모두가 잠든 밤, 제설차 기사분 혼자서 조용조용 밤을 지새운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으로 눈안개가 드리워진 밤풍경은 아름답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안고 평안히 잠을 청한다. 이른 아침, 창밖 도로의 제설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눈은 계속 내리고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데, 그분 덕으로 주민들은 안전하게 집 밖을 나선다.


▲  깊은 밤 함박눈 내리는 뒤뜰  © Kyrene


거실과 발코니 사이 유리 출입문은 거의 절반 가까이 눈이 쌓여 올라와 언덕을 세우고, 발코니 데크는 밤사이 눈 덮인 작은 평원을 만들었다. 처마 끝 거대한 고드름은 주상절리(柱状节理), 빙벽이 되었다. 발코니에 서면, 철 따라 시간 따라 환상적인 풍경으로 언제나 나를 반겨주던 허드슨강은  비할 바 없이 귀한 선물이었다. 


▲ 발코니 앞 허드슨 강(Hudson River) 노을  © Kyrene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강줄기 물빛은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른 새벽 짙은 물안개 속으로 숨어버리기도 하고, 저녁노을 아래 윤슬은 화려한 오렌지빛으로 단장을 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겨울 눈 덮인 강변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넉넉하고 듬직한 산등성이 설경(雪景), 온 세상이 하얗다.  


▲ 남한강 백설과 윤슬  © Kyrene


첫눈 내리는 공원 숲길을 손잡고 걸으며 마냥 행복했던 갈래머리 내 친구, 소복소복 끝도 없이 내려 쌓이는 새하얀 눈길을 밤새 홀로 지키던 아저씨, 눈 속에 파묻힌 채 따뜻한 불빛 아래 다정한 이웃 지붕들이 마치 꿈결 같다. 강물 따라 흐르는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나의 겨울 이야기는, 늘 이렇듯 그리움으로 되살아 난다.


요즈음의 나날이, 나중에 가슴 쓸어내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겨울 이야기로 추억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전쟁과 재난으로 평범한 일상(日常)을 빼앗긴 사람들이 드디어 평화를 되찾았다.' '그 겨울 느닷없이 벌어진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도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끝내 극복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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