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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Feb 17. 2024

런던에서 보낸 1년 (7)

영국 워킹홀리데이

도로타는 영국 스타벅스의 전 메뉴를 알려준다. 직감으로 안다. 나는 곧 바리스타 일을 할 것이다.


‘바리스타...?’

커피는 좋아해도 커피 머신은 만져본 적 없고 직접 만들지도 못했던 나.

모든 것이 혼란스럽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중에 집중을 거듭한다. 카페라테는 우유에 에스프레소 더블샷이 들어가고, 숏/톨/그란데/벤티 등 사이즈가 달라질 때 에스프레소 샷이 추가되거나 줄어든다. 시럽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잊혀진 ‘된장녀‘의 카라멜 마끼아또에는 바닐라 시럽과 에스프레소 샷을 각각 두 번씩 넣는다. 카라멜 시럽이 아닌 바닐라 시럽이 들어가고 부드러운 우유 폼 위에 카라멜 시럽을 격자무늬로 올리는 것이다.


이 일은 생각 외로 재밌었다.

나는 분명 수학 같은 것이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치마를 벗고 나왔을 텐데 완전히 레시피를 흡수했다.


“경혜, 이걸 어떻게 다 외웠어?”

“그냥 외웠는데?”

“확실해? 이렇게 단기간에 외우다니 대단해!”


나의 끄덕임이 진짠지 가짠지 시험해 볼 차례다. 족히 180cm이 넘는 슈퍼바이저가 옆에 서있고, 나는 홀로 덩그러니 커피 머신 앞에 우두커니 있다. 카운터를 보는 직원이 메뉴를 받아 적고 컵을 건넨다. 그럼 나는 컵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해독을 한다.


’세미 스킴 카페라테? 저지방 우유부터 스팀 하고..‘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대략 30잔을 내보냈다. 만들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틀린 레시피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 잘리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보니 후회도 미련도 생기지 않았다. 도로타가 알렉산드로에게 달려가 상황을 전달한다.


”경혜가 레시피를 벌써 다 외웠어! 믿기지 않아 정말!“

”그래? 내가 직접 봐야겠네.“

“알려준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어떻게 다 외우지?”

“...”


또 로봇처럼 커피를 만든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커피 머신 앞에 있다. 까칠한 매니저가 지켜보는 가운데 매장은 점점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샷을 내리고 스팀하고 시럽 넣고 물로 씻고 주문을 숙지하고 다시 샷을 내리고를 반복한다. 태어나서 처음 가장 많이 남의 이름을 부른 날이었다. 화통을 삶아 먹은 사람처럼 미친 듯이 이름을 불러댔다. 화가 난 것처럼 악을 쓰고 있었다.


잘리지 않으려면, 실수가 없어야 한다. 즉, 실수하면 잘리는 것이다. 빨간 하이힐처럼 아주 아찔하게.


마음속 자리 잡은 불안은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커피숍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고 그저 돈 버는 일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직원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 생각했지만 매일 외국인들과 얼굴을 맞대는 일은 거북했다. 정을 붙이기는커녕 대화 몇 마디도 하지 않고 그들도 시키는 대로 일하는 내가 낯설었을 것이다.


슈퍼바이저는 3명이 있었고 바리스타 직원은 나 포함 대략 7명쯤 있었다. 그리고 2주가 다 되어갈 때쯤 일본인 슈퍼바이저가 나타났다. 나를 제외한 아시아인은 인도인, 미얀마인, 일본인이었는데 그들 모두 유학생이었고 주 16시간을 일할 수 있었다.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나는 돌아가며 그들과 함께 일했다. 나는 매니저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나왔다. 선택권이 없었다. 나오라면 나왔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한 번은 버스사고가 나서 30분 늦은 것 외에는 어느 시간대건 어떤 요일이건 상관없이 정시에 출근했다.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수습이지만 정직원들과 같은 선상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미 정직원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니 아는 단어도 생소할뿐더러 영국식 발음은 항상 외계어처럼 들렸다.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고 정확한 레시피로 커피를 만드는 일에만 몰입했다. 더군다나 일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고, 어린 나이지만 힘든 일을 쳐내면 살아남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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