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혜 Mar 30. 2024

런던에서 보낸 1년 (12)

영국 워킹홀리데이

“알레, 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

“언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귀국일이 정해졌다. 비행기표도 되도록 저렴한 것으로 끊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왜 전혀 기쁘지 않은 것일까.


8개월 차가 되니 모든 것이 능숙해 눈감고도 커피를 내리고 주문을 받고 청소를 한다. 소중한 일상도 시간에 바래져 불안이 깃들고 원하는 다시 출발선에 서야 할 것만 같다.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무언가가 단단히 나를 감싸고 있다. 이대로라면 하루가 저물고 베개에 기대어 누우면 잠이 들지 않을 것을 안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다.


”벌써 한국에 온다고?“

”1년 채웠으니 돌아가야 해.“

”언제는 2년 다 채운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래? 한국 들어올 생각이면 오자마자 취업부터 해!“


나는 한 번의 휴학도 없이 졸업을 했고, 꽃다운 24살을 런던에서 보냈다. 세상에 그대로 던져진 어린 나는 죽어라 앞만 보고 달렸고 또 달려야 할 때가 왔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내리친 것 같다. 겨우 1년을 버텼더니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 되풀이된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이불속에서 들어가 하늘만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 줄 알지만.

우리집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엄마를 이해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 ‘귀국 후 플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렵고 어려운 고되고 또 고된 인생이 뿌리내리고 단단하게 자리 잡아 아무리 흔들고 흔들어도 송두리째 뽑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냉혹한 현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케 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오빠를 뒷받침하느라 지친 늙은 부모의 심정도 헤아려졌다. 가장 미운 것은 오빠였다. 그래도 오빠가 분기별로 통조림캔을 보내줬고 챙겨줬다. 그것이 나의 런던에서의 삶에 낙이였고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자립하기로 결심했다.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대를 졸업한 것도 우수한 학점을 받은 것도 뛰어난 전공도 아닌 별 볼 일 없는 사학도였다.


갓 대학생 때부터 마트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왔고, 런던에서도 글로벌 기업 체인점에서 열심히 커피를 팔았다.


어쩌면 당연한 정해진 길목에 서서 택지는 별로 없었다. 펜을 잡는 일은 죽어야 가능하고 가방끈을 늘리기에는 아무도 그 아무도 내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는 태양이 사라지는 날에야 만나질 정도로 까마득한 거리다.



눈꼬리는 입꼬리와 같이 축 쳐진 상태로 울먹인다.


“경혜, 가지 마!”

“나 가야 해.”

“한국 연락처라도 알려주면 안 돼?”

“...”

“이메일이라도 알려줘 제발!”


흰색에 베이지를 살짝 섞어둔 듯한 피부색에 갈색 주근깨가 그라데이션 된 볼 부근, 깃털처럼 아름다운 눈망울에 핀 속눈썹이 한껏 움직인다. 나를 향해 울부짖는 그녀는 처연했다. 그 노래가 내 마음 깊숙이 박혔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나를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오직 희망이고 꿈이다. 닫힌 문을 두드리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눈인사뿐이었다.


사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깊지 않다. 앙숙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눈초리를 주고 무지막지하게 싹수없게 굴었다.


도로타와 깊은 눈 맞춤으로 편안한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질투에 눈이 멀었고, 무슨 연유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무수한 질문이 쏟아졌다.


런던 스타벅스에서 마지막 날.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편지와 귀여운 검정포인트가 들어간 실버 귀걸이를 건넸다. 실버 귀걸이를 손에 들고 갸우뚱하는 나를 보고 벼룩시장에서 데려왔다고 했다. 내가 가진 어떤 귀걸이보다 빛나지만 나는 귀국한 이후로 그녀의 이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시간 들여산 귀걸이도 단 한 번도 차지 않았다.


나는 닫힌 사람이었고 심적으로 여유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외치고 싶다. 하루에 수만 번씩.


연극이 끝나고 커튼은 닫혔던 그날.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나의 감정이 떠오를 뿐. 마지막으로 누구와 일했는지 단골들과는 작별인사를 했는지 기억이 사라졌다. 그저 바네사가 건네준 귀걸이로 그녀와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갈 뿐. 아무것도 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전 11화 런던에서 보낸 1년 (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