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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Mar 09. 2024

런던에서 보낸 1년 (10)

영국 워킹홀리데이

12월이었다. 바네사는 나에게 휴가 일정을 물었다.


“휴가? 꼭 가야 해?”

“당연하지. 유급휴가인데!”

“유급휴가? 정말이야?“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유급휴가를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트에서 발렌타인 초콜릿을 목표치보다 120% 팔아 해치워도 손수 돈까지 쥐어주며 휴가를 주지 않았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2주간의 휴가를 얻었는데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120만 원씩 월세를 내고 입에 풀칠할 정도가 딱 내가 영위할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런 나에게 여행은 희망이자 한편으로는 무한 루틴의 구조를 만들어 냈다.


‘통장이 마이너스가 돼도, 다시 돈을 벌면 돼.’


<예상밖의 휴가>로 인해 그토록 열망하던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되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갈 수 있었다. 여자 주인공처럼 남자 주인공 같은 인물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머릿속에는 온통 영화와 중첩되는 배경들이 떠올라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꿈의 여행지로 가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피사를 시작으로 피렌체를 들렀다 밀라노로 아웃하는 일정이다. {난생처음 혼자 여행}을 하니 긴장도 됐지만 무엇보다 숙소가 걱정이었다. 잠자리가 예민한 탓에 혼자 잘만한 저렴한 숙소가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10만 원 내로 자려고 보니 전부 복도를 개조한 1인실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자다가 깨길 반복했다. 피로는 나의 친구였고 버리지 못한 습관이었다.


그 순간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언제 떠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매일 한 잔씩 무료로 파트너 음료를 마시면서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있는 고민 하나가 영국에서의 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만족하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내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안식처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삶은 나를 죽어가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력서에 적을 한 줄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을 견뎌내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독립적이지만 가장 외로웠던 자신과의 사투를 시작하자마자 끝맺을 날만 기다린 것이다. 무엇 때문이 아니라면 일찌감치 짐을 쌌을 것이고, 또래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 멈춰진 시간 속에서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용돈 받아쓰기나 할 걸 그랬다. 하지만 나의 챌린지였던 {런던 스타벅스 취업}은 성공적이었고, 또 성장했다. 혼자서 당당히 세상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깨우쳤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매니저가 제안했던 슈퍼바이저 자리도 한사코 거절했다. 2년을 태우려면 분명 그 자리에 서야 했지만 더 이상 나를 사지로 몰지 않기로 했다. 객관화했던 삶에는 감정을 실리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이랄까.


스타벅스에서 일한 지는 벌써 5개월째가 되었다. 기계처럼 응대하다 보니 하루는 빨랐고 나는 메말라 갔다. 스몰토크를 하는 단골도 생겼으며 한글로 적은 이름표를 영국식 억양으로 읽어내는 현지인들도 만났다. 작고 소중한 것들은 나의 큰 바람에는 미미한 영향이었을 뿐. 런던에서의 1년을 채우려면 아직 4개월이 남았다는 생각과 하루를 세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아직 매니저에게는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같이 일해 정신적 지주가 된 도로타와는 비밀이 생겼다.


그날은 코끝이 시릴 만큼 공기가 서늘했는데 처음으로 이른 새벽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기차통 같은 알람은 옆방에 곤히 잠든 발레리노까지 깨울정도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헐레벌떡 현관문을 나섰다. 첫차에서 단잠에 들 생각에 설렜다. 그 꿀 같은 시간을 떠올리며 얼어붙은 발끝을 한 발짝 두 발짝 떼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추위와 사투를 벌이다 어느덧 버스가 도착했다. 2층버스에 오르려고 고개를 드니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지? 내가 탈 자리가 있나? 이거 못 타면 지각인데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거야?’


오이스터 카드를 찍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갈 곳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나는 기사 옆에 멍하니 서있었다. 서있을 곳이 없을 만큼 빼곡한 버스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형광색 조끼를 입어 더욱 빨개진 볼이 부각되는 어르신과 잔뜩 짐을 짊어진 청년 등 새벽버스 안의 풍경은 감히 내가 푸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들의 눈빛으로 하여금 나를 반성케 했고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그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또 나는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불공평하게 돌아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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