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속성
릴리는 세계를 떠돌게 된 배경을 들려줬다. 여행에서 만난 미국 친구를 초대했고 그가 마음에 들어서였다고 했다. 그렇게 대만에서 일 년을 보내며 진전이 있을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관계는 정체돼 있었다고 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화에 집중했고 릴리는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를 사랑했구나.."
“(뜸을 들이며) 그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왜?”
노력해도 가질 수 없었다는 문장이 구구절절한 사연보다 구구절절했다. 이슬이 고인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내 외모 때문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 돼. 피부색이 까만 건 태양 때문이지. 인종을 나눌 순 없어.”
진화론을 언급하며 아는 채 하고 싶었지만 릴리는 고개와 어깨를 동시에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 고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회상하듯 다시 고개를 든다.
“한 방에서 자면서 미래를 꿈꿨지만 친구에 그쳤어. 나는 적극적이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어. 하지만 그는 나에게 처음 디지털노마드란 신종 직업을 알려줬어. 너도 알다시피 그 당시 이 직업을 아는 사람은 아시아에서는 극히 드물었어. 미국인이니까 누구보다 잘 알고 지금의 내가 탄생한 거야.”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눈썹을 가만둘 수 없었다. 자연스레 눈이 커지면서 목구멍이 보일 만큼 입도 벌어졌다. 한국에서 디지털노마드란 직업을 인식하기 시작한 때보다 훨씬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너를 만났더라면, 지금쯤 부자가 됐을 거야.”
당찬 한마디에 웃음바다가 되면서 대화는 매듭지어졌다.
오랜만에 남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으니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낙엽만 굴러가도 박장대소하던 시절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지금 만난 남편은 어때?”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는데, 올해 말에 같이 여행할 것 같아.“
”좋다! 나는 지금처럼 남편 휴가기간 맞춰서 세계여행을 다닐 거야. 어디로 가?“
”남편이 호주에 있으니까 호주를 둘러볼 예정이야.“
”나도 워킹홀리데이 가고 싶어. 부럽다!“
주전부리 같은 대화를 하며 페로 다리를 지났다. 페로 다리 사이로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고 우리의 도보여행은 꾸준했다.
매일 밤 맥주를 했더니 등근육이 죽은 듯한 구부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지못해 걷고 있던 찰나 릴리의 탄탄한 근육이 지배한 다리를 보니 부러움에 한숨이 나왔다. 취미가 등산이라면 할 말이 없어진다. ‘산은 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라고!’ 같은 한쪽으로 쏠린 입꼬리가 심화된 표정을 말해준다. 릴리는 베네치아에 오기 전 등반한 돌로미티의 절경을 보여준다. 이에 질세라 에트나 화산 정상과 케이블카 사진을 들이댄다. 꿀샘과 향기 가득한 미소가 공기 중으로 번졌다.
어느덧 프라토 델라 발레에 도착해 중앙 분수대로 향했다. 캐나다 빅토리아가 떠올랐다. 물론 가본 적은 없다. 막연하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가 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포토샵으로 치면 대비값이 마이너스 최대치인 상태였다. 싱그러운 초록빛은 색 바랜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고 지중해를 뿌려놓은 듯한 하늘은 물 빠진 하늘색으로 변해버린 족히 백 살을 먹은 유화를 보는 것 같았다. 분수 주변으로는 파도바 시에 공헌한 유명인사들의 조각상을 볼 수 있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였다. 앉은자리에서 성 안토니 대성당이 보였으니깐. 나무 그늘이 필요한 태양볕이 따가운 벤치여서 백 걸음도 걷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자연을 닮은 색감은 아름답다. 하늘을 그대로 얹은 듯한 비잔틴 양식의 돔과 외벽을 덮은 벽돌은 땅과 흡사하다. 번듯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내부는 색이 바랬지만 존재만으로 빛이 난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주스토 데 메나부이‘는 기존 작품과 다르게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영향을 받은 프레스코화를 남겼다. 성 안토니의 유물을 모신 예배당까지 둘러보며 파도바를 머리로 시작해 가슴으로 느꼈다.
뾰족한 아치형태의 고딕 양식과 돔형태의 비잔틴 양식,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합쳐져 뚜렷한 건축 양식을 띄지 않지만,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과 닮아 있어 정겹다.
대성당을 등지고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역사로 향했다.
빵집 앞은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동시에 흰색 뿔테에 왕진주 귀걸이, 고급 시계를 찬 백발의 할머니가 지난다. 보행보조기에 손을 얹고 구부정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간다. 여전히 정갈하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카메라를 켠다. 우선 맨 눈으로 담고서 카메라 버튼을 누른다. 여행을 하며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파도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찰나에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