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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Sep 18. 2024

번외편: 스위스 바젤에서 다시 런던

오랜 허기

이번 번외편에는 뜨거운 여름을 담았다.

가장 최근에 다녀온 여행지기도 한 ‘스위스 바젤’과 ‘영국 런던’에서의 에피소드다. 남편과 이탈리아 남부를 돌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여행의 답은 런던임을 깨닫는다. 런던에 있을 때 가장 나다워서인지 모르지만 이번 여행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잃어버린 자신일 것이다.



나는 땅에 깊숙이 박힌 자잘하게 금이 간 장독대안에 고이 모셔둔 타임캡슐을 열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여행을 했다.


해외에 혼자 있게 되면 늘상 그때로 돌아간다. <여행으로 채우는 삶>을 쓰기로 한 본래의 까닭으로 시발점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찬란해서 눈부신 자유에 가까운 청춘의 실루엣이 피부에 닿았다 차갑게 사라진다. 너무나 아련해서 형태도 잃어버린 날들로부터 발목을 붙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모호한 시간에 갇혀있다.


과거와는 달리, 스위스 물가를 버텨낼 재간이 생겼다. 반지하가 아닌 따스한 숙소의 침대에 누워 납작 복숭아를 베어물고 무념무상의 얼굴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은 찾아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숲 속을 활개 친다.


매 순간 멍했다. 아트 바젤에서 이틀을 완전히 소비하고,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바젤역 맞은편에 자리한 마트에 들렀을 뿐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마트는 첫인상부터 신비로웠다. 자신의 덩치만 한 반려견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요술램프 지니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 그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면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았다.

꼬릿한 치즈에 흠뻑 젖은 발효된 빵을 먹다 집게를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큰 지출이었으나 바젤에서의 첫 외식이기도 했다. 잔뜩 부담은 덜어낸 꼬깃꼬깃한 비닐봉지를 들고 총총 걸어갔다. 레스토랑과는 불과 100미터 거리에 있으나 좀비가 된 것마냥 비틀비틀 발을 뗐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잔잔한 호수가 예기지 못한 폭풍우를 만나 파도가 되는 것처럼 내 마음도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홈리스가 되어 본 적은 없어서, 동양여자애가 건방져 보일 수 있어서, 별것에 손가락질할까 봐서 하는 묵직한 찰나의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첫사랑에게 첫 고백을 하던 날. 울었던가? 웃었던가? 알지 못한다. 무의식에 잠식된 기억을 모조리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필름은 끊겨 전개되고 있었다.

거뭇한 석유찌꺼기를 덕지덕지 바른 얼굴을 하고 손을 떨고 있었고 그 손은 불특정 상대를 향해 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콜중독. 혹은 약중독을 의인화한 모습에 갑자기 처연해졌다.

떨림에 심장을 움켜쥐고 빵을 건넸다. 쭈글쭈글해진 비닐을 열어보더니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던 자신을 맘껏 비웃고 타달타달 요란하게 움직였다. 누구보다 당차게 걸으며 내 존재를 실감했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스위스 바젤. 어쩌면 올해 아니면 평생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몰라서? 나를 의연하게 만드는 도시. 나는 언제부터 굶주림이 있었던가. 따뜻한 둥지가 주는 포근함과 정반대인 세상의 존재는 현대인에게도 살아내기 벅찬 일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까? 여행을 도무지 할 수 없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숙소로 가는 길목. 또 주저앉고 말았다.

할머니 한분이 길모퉁이 땅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백발. 깊은 주름. 굽은 등. 또 무엇으로 불쌍한 노인을 표현하랴. 씩씩한 걸음걸이는 전봇대를 들이받고 다시 한번 멈춰서고 만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순간들. 때마침 부처가 앉은 방향으로 앉아 있어 입맛이 싹 사라진 상태다. 생명수와 할인받은 햄치즈빵도 내 입에 넣을 수 없는 이기란 생각이 든다. 얇은 이불을 깔아논 자리도 엉망이지만 소나기가 지나고 냉기가 도는 날씨도 한몫한다.


‘엄마, 어째서 우리할머니가 길바닥에 있을 수 있어?’

마음을 놓고 울었다. 이후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이 중첩되어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배를 곯았지만 10년 전으로 돌아간 나 자신은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배를 채우던 시절은 바람따라 흩어졌고, 10년 후 샤넬백을 버리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절의 나와의 완전한 결합.

나는 더 이상 여행할 필요가 없어졌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으로 단단한 괴물이 되어 또다시 런던을 찾았다.

숨을 내뱉는 순간에도 아파했던 날들. 매일이 버겁던 그 시간을 조우했다. 첫불꽃놀이를 봤던 프림로즈힐의 노을은 나를 기다렸단 듯 우아한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안녕, 나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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