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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Oct 02. 2024

부록: 스페인 소매치기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신가요?

저의 지갑 아니 당신의 지갑이 된 그 지갑의 행방은 알 수 없겠죠.

덕분에 지갑에 얽힌 추억은 사라졌어요. 그 지갑은 말이죠...


바야흐로 1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해요.


스타벅스에서 뼈가 빠지게 일한 돈을 모아 이탈리아 북부 여행을 떠났더랬죠. 그 여행에서 형언할 수 없는 외로운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참고 또 참았어요. 피사의 사탑에서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찍는 포토제닉한 사진을 남기고 피렌체로 이틀 정도 홀로 여행했죠. 그때부터 시작이었나봐요. 혼자 여행하는 거 말이에요. 혼자 밥 먹고 구경하고 생각하고 쉬는 게 생각보다 잘 맞았어요.

이탈리아는 관광지 위주로 다녀도 충분한 인사이트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시절 유행이던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고 피렌체로 갔던 거란 말예요. 붉은 돔과 어둠이 뒤섞인 잿빛 야경을 담으며 믿을 수 없는 고독을 느꼈고요. 고독함이 저를 또 지탱했어요.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어요.


‘혼자라도 괜찮아.’

사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에요. 저는 온전한 가족이 있고 늘 곁에 있죠. 외롭거나 고독하다는 말은 무척 단편적인 감정이었어요. 얕은 감정이라도 알게 해 준 가족들을 위해 저는 아울렛으로 가야 했어요. 도심 외곽에 있어 기차를 타야 했고요. 기차를 탈 돈이 넉넉지 않아 한번은 펀칭 안 한 거 있죠? 멍청하고 우매한 짓이었어요. 벌금을 표의 2배로 내고서야 정신 차렸어요. 그때 이후로 절대 무임승차는 하지 않아요.


그런데 선생님은요?

아직도 남의 물건 아니 귀중한 것들을 탐하나요? 신이라면 벼락을 내려 장애를 줄 것만 같아요. 하지만 누구보다 잘 살 거 알아요. 죄를 모르는 분이니깐요.


명품 아울렛은 처음이었어요. 큰맘 먹고 가족 선물을 샀어요. 가방과 지갑 2개를 사고 돌아왔는데요. 그중 지퍼만 달랑 있는 빨간색 지갑이었죠. 금장 네이밍이 되어 고급스러워 보였어요. 너무 작았지만요. 저는 그 지갑을 소중히 하고 썼어요. 그래서 지갑 내부는 동전의 거무칙칙한 때가 그대로 남아있어 볼품없어요. 소가죽이라 빨간 껍질은 윤이 났지만요.


어떻게 지갑인지 알았어요? 너무 궁금해요.

정확히는 마드리드 호텔에 도착해서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어요.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인 아토차역에 내렸잖아요. 그 버스에서 내릴 때 저를 막고 지갑을 훔쳤죠. 정확히 지갑만 가져갔어요. 가슴팍에 맨 힙색에는 지갑, 여권, 달러뭉치가 있었지만요. 1분도 안 되는 찰나에 지퍼를 열고 지갑을 확인한 당신이 처음에는 소름 끼치도록 싫고 미웠어요! 왜냐고요? 나름 여행 고수인데 소매치기는 난생처음이었거든요. 저의 자존심에 스크레치를 냈단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래서 저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경찰서로 갔지만 결국 잡을 수 없었어요. 심증으로는 당신을 잡을 수 없단 말을 반복해서 듣는 일만 할 수 있었네요.


그래요. 고맙다고요.

그 순간이 담긴 지갑이 사라지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인생 중 그 시절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절대 명품은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어요. 매일 밤 악몽처럼 소유하는 것이 고통인 것을 깨달았어요. 마치 저주에 걸렸던 저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됐고요. 무소유의 가치가 물질이라는 하찮은 물건이 주는 의미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요.

정신병처럼 월급보다 비싼 샤넬백을 사는 욕구를 누르고 [포르투갈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었고요. 런던에서 시작한 인생여행은 오늘에야 끝낼 수 있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살기로 했어요. 그 형용불가한 행복감이 정신의 풍요로움을 가져왔거든요.


어쩌면 저는 당신을 존경해요. 그리고 단언컨대 당신은 매일이 지옥일 거예요. 그래야 하고요. 과거의 나를 가져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이 가는 길이 엉망인 걸 모르는 게 행복해요 저는. 돌고 돌아 돌이킬 수 없는 정신상태를 갖고 자식 앞에 또 도둑질을 가르치겠죠. 평생 비루한 인간의 껍데기로 남아주세요.


나의 스승. 소매치기 선생님. 그날엔 편히 영면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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