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어린 왕자 감상문
어린 시절 방학 때면 방학숙제 독후감을 위해 나눠주던 어린이 혹은 청소년 필독 도서 목록이 있었다. 대다수 고전 명작들이며, 의심할 여지없는 좋은 책들이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책들을 마주할 때면, '어린이들이 이러한 내용이나 감성을 이해할 수가 있나?'라며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의 책들이 제법 많다.
오늘 얘기할 '어린 왕자'는 심지어 책의 서문에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본인이 어린이들에게 사과까지 하며, 어른들을 위해 이 책을 지었노라,라고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필독도서에 거의 빠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 한가운데 불시작 하게 된 주인공이자 화자가 어린 왕자를 만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물론 시작 전에 그 유명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시착한 사막 한가운데서 생존과 비행기의 수리를 고민하던 중 불쑥 나타난 어린 왕자는 그림을 그려달라거나,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정작 화자의 질문에는 전혀 대답해주지 않는 등 뜬구름 잡는 예기들로 화자를 상당히 집요하게 괴롭힌다. 나 역시 어른이 된 입장이라 그런 것인지 그 상황을 상상하니 상당히 귀찮고 짜증이 날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되었다.
작품 중반부부터 어린 왕자가 사랑하는 장미꽃이 있는 모행성 B612를 떠나 지구까지의 거쳐왔던 6개의 행성에 관한 여정을 화자에게 이야기한다. 다스릴 것이 없는 왕의 행성, 숫자에만 몰두하는 사업가의 행성, 하루종일 일만 하는 가로등지기의 행성, 자랑만 하는 허영꾼의 행성 등등 이 부분은 어른들의 사회를 투영한듯한 각기 다른 행성들의 모습, 지루하고 따분한 어른들의 세계를 비꼬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모습이 지금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어느 별에 살고 있는 걸까?
짧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우와의 만남 그리고 이별. 어린 왕자는 지구에 도착해 무수히 많은 장미를 보고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한다. 그런 어린 왕자에게 갑자기 나타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이거나,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해준다.'길들여지다'라는 표현이 내게는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여우가 말해주는 '길들여지다'의 의미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그리고 익숙하게 다가와 무수히 많고 흔한 것 중에 단 하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어린 왕자가 사랑하고 길들인 장미는 지구에 있는 무수히 많은 장미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을 알려준 여우는 자신도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져, 결국 어린 왕자와 이별하며 슬퍼한다.
"밤마다 하늘을 볼 때 말이야... 그 수많은 별 중 하나에 내가 살고 있고, 웃고 있으니까, "
"너는 마치 모든 별들이 웃고 있다고 느낄 거야, 너는 이제 웃을 줄 아는 별을 갖게 된 거야!"
비행기를 다 고친 화자와 돌아갈 준비를 마친 어린 왕자는 그렇게 이별을 맞이한다.
"나중에 네가 기운을 차리면 (시간은 모든 슬픔을 진정시키니까.) 나를 만난 걸 떠올리고 기분이 좋아질 거야... 너는 별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겠지, 그러면 네 친구들은 너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난 네게 조금 짓궂은 장난을 친 거야, 그러니까, 나는 별들을 대신에 웃을 줄 아는 무수히 많은 밤하늘의 방울을 네게 준거야"
아마도 이렇게, 화자도 어린 왕자도,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만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특별하게...
<어린 왕자>를 다시 읽기 전까지 나에게 이 작품은 어릴 적에 읽은 재밌는 삽화가 많고, 상상력과 동심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던 어린이 동화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30대가 넘어 다시 읽은 <어린 왕자>는 따분한 현제의 나를 돌아보게도 또 설레게도 하고, 또 가슴 시리게도 하는 아주 따뜻하고 또 좋은 이야기였다. 혹시 나와 같이,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 왕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 다시 읽기를 추천한다. <어린 왕자>는 어린이 필독 도서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필독 도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읽기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