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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이미 Aug 02. 2024

 길은 언덕과 물 위에 ..

 『연암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고 연암의 예리하고 따뜻한 통찰과 사유세계의 자유로움 그리고 풍자와 비유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독서와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유의 세계에 숙연해진다.


떠돌이 거지, 천한 역부, 불우한 위항인 등 하층 민중등을 주된 캐릭터로 등장시켜서 가식 없고 성실한 삶을 노래하고 기존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다.


  연암은 고착된 현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벗어던진 용기 있는 진정한 지식인이다.  이런 자질은 현대의 지도자들이 갖춰야할 자질이라 생각한다.  

 내가 연암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사회적 약자를 그의 작품 세계에 주요 캐릭터로 등장 시켜 서술하고 있다는 점과, 잘못된 사회 현상을 놔두지 않고 글로써 비판한 점이 지식인다운 점이라 생각해서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나의 아버지께서는 연암의 면모를 지니신 분이었다.  1960년대 돈이 없어 진학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월급을 집으로 가져 오지 않고  곤궁한 학생들의  공납금(학비)으로 다 내어주신 진정한 교육자이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해 늘 정의롭고 바른 말을 하신 이유로 좌천되어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은 산간 벽지로 발령을 받을지언정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어렸을 때  이런 아버지의 모습과 처신에 줄곧 잔소리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난 못마땅 했다.  어머니에게 인기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자식보다 학생들을 더 먼저 배려하던 아버지의 인품과 행동들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애들처럼 비단 구두나 승용차가 없었지만 자존감은 상당히 높았다.


  난  현실적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보다 이상적 교육을 실천 하셨던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현실적 자아보다 이상적 자아가 더 컸기 때문일까?

훌륭한 아버지는  어린 눈에 비친  참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아버지 딸이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난 모든 교육자가 다 그런 줄 생각하고 살았다.


 난 지난 36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학교의 수장들을 비롯해 소위 혼자  똑똑한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 왔다.

 아홉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한 학교에 육십 칠십 명 이상의 고학력  지식인  사이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나이를 먹어 갔다.


 속된 표현을 빌면, 간의 여정에는 "꼴에 꼴방망이 찬 사람" 들도 참 많았다.  무늬만 있고 실제는 아닌  경우도 있고,  허세로 가득차 있기도 하고 권위로 군림하는가 하면 권력의 우산에 들어가 안일해 보려는 부류들 , 나름의 기준으로  붕당을 형성해 편가르기도 하는 모습들을 보아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어느 해 일이다.

전교에서 우리반 학생 혼자 서울대에 합격한  일이 있었다.

 졸업 사정회에서그 학생이 학교 이름을 고양했다 하여 수상자로 협의해 놓고  막상  졸업식날에는  다른 아이가 수상하게  둔갑 시킨 일  등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졸업 당일 벌어진 일!

 바빠서 생긴 착오라 해야 하는지 참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수습해도 의미없는 일이었고,졸업하면 끝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었을까?  의도된 오류 아닌가?  동과인 교무기획에게 물었다. 바뀐 연유를 .


교무기획은 동갑이고 가까웠는데 그 일을 계기로 그와는 소원해졌다. 그가  세파에 물들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인가?  자기부장겸 선배인 교무부장의 위세에 편승 한 것인가?

거듭 나를 고민하게 했다.


 학부모입장에서는 담임인 나도  그들과 한통속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음이 자명했고 공교육 학교를   불신하게 만드는 일을 부끄럼없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사교육없이  지도하여 4등급을 서울대 입학시킨

고 3 담임에 대한 감사는 이내 원망이 되어 돌아왔다.


난 그일  이후 그 교무부장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니 상종 못할 인간으로 부류했다.


감히 교무부장에게 소위 "따졌다"는  소문이 난 나는 그의 눈엣가시가 되고  한편에선 작은 영웅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가르치는 것이 본질이니 본말이 전도되면 안 된다.


하지만   음흄하기 짝이 없던  그는 늘 승진에 기웃거리다가 결국  유명 논술 스타로 반짝여 시내 신문사 논술 강좌 투고도 하며 승승장구 했다.


 그러더니 동료교사의 공을 가로 채어 잠시 명성을 누리더니 학부모들이 그 진실을 알게 되학부형 사이에 소문이 나고 그 중 누군가에 의해 그는 가짜 논술 강사라고 온 학교에 소문이 확산  되었다.

 이 소문은   결국  몇년이 흐른 뒤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것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난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젊은 시절 높아보였던 그의 보직은  나이들어 그를 만났을 때에그는 초라한 빵부스러기찾는 욕망 가득한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그 뒤 그가 잘 나가는 지역의 모고교 교감이 되어 있었다.  때는 김영란법 실행 이후로 각종 보직은 기피하게 되는 교육 풍조속에서 간신히 승진용 점수를 위한 자리이거나 아니면 책임만 지는  직책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폐쇄된  공직사회는 조금씩  열리는 틈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의  인성 논란이 인사 고가에 반영 되는 지를 아는 듯 모르는 듯 했지만 마침내 그가 교감으로 퇴직하는 것을 난 멀리서 바라보았다


 또 어느 해는 열심히 하는 선배 교사를 두고  자기 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같은 교과 사람을 음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교 출신이란 이유로 후배 학생들에게 조작 여론을 형성하여 학교 홈피에 가짜 정보를 날조 형성하는 등 웃지 못할 일도 있다.

 근거없는 낭설이 올라와서 난 그 당시 교육 정보부장을 하고 있던 터이라 진실 규명을 위해   학교 홈베이지를 관리 하며 면밀하게 점검하였다.


  특정일. 특정시간, 사용된 IP  추적 결과 낭설의   발원지는 그의 IP였다. 난 그 사실을 알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동료끼리 자기가 부족하면 더 노력하면 되지 남을  무고하는지  과연 교육자인지 회의가 들었다 . 그의 웃는 표정뒤에 숨은 검은 그림자는 그의  쓰레기 인격이 엄연히  존재함을 방증한다고나 할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오죽했으면 남고생들이 산적이니 도적이니 하며 '파묻고 싶다!'고 표현 했으랴! 표현에는 그의 인면수심인 그의 인성을 표현한 말이라 생각되었다.


그래도 그는 '산적'인 그의 호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부로  최상의 근무 학점을 받아 제일 상석에 앉아 호가호위 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의는 죽어가고  이해 관계에 따라   변화하는 사람들만 승승장구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입시 현장 속에서 미래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던져 버리고 싶었던 탈출하고 싶었던 때가 왜 없었겠냐마는 그래도 눈망울 똘망똘망한 남자고교생들은 판단력이 예리하고 정의감이 있어 때묻지 않은 십대를 교육하는 일은 행복했다.

 그들에 대한 실망보다 학생들에 대한 희망이 더 큰 자신을 발견했고 목구멍도 포도청이기도 했다.

 교육행정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제대로 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분은  철학박사였던 두 분 정도가  괜찮은 분이었던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제대로 된 관리자를 보지 못 했고, 그렇기에 굳이 승진의 길을 택하지도 노력하지도 않았다.


 사범대란 학연으로 특정 무리들이 좌지우지 하는 학교 문화는 기득권을 지닌 자들의 공간이다.

 업무분장에서 능력보다는 공과사를 분별 못하고 자신과 연관,연줄이 있으면 봐주기식과 패거리 문화는

고착된 우리  사회의 병폐이다.


 소위 말하는 " 우리가 남이가?" 무능한 관리자들과  사고의 자유로움결여된 폐쇄된 지도자들은 현상유지에 급급하다.


 이에 동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며 그럴싸한 명분을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하고 그리고도 모자서  공정이란 양념으로 감칠맛 나게 한다.


  어느 해 연수에서 본의 아니게 1등을 하였다. 중등교원연수원에서 담임 장학관이 호출하여 가보니 1등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더니, 아버지께서 “교육계가 다 썩었다. 넌 그런 길을 가지 마라.”하셨다.


 1등 점수가 긴급한 사람에게 필요 없는 내 점수를 주는 것은 ‘선’이 아니기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료식 때 나는  나도 모르는 4등이 되어 있었고

내 점수를 가져간 그 분은 다음 학기  9월 1일자로  '모 0 고교 교감으로  승진 발령'이 났다.


그때 나이 서른 살,

 난  정의감은 있었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은 되지 못하였다. 군사정권 어두운 시절이어서일까?

난 오기가 나서 다음해 교원연수원의  연수를 신청하였다.

 "이번에도 장난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는 마음으로 8개월의 만산인 몸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결과는 1등이었다. 담당 장학관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나의 눈치를 살피며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있을겁니다."

 마치 자신이 내 연수 점수를 부여하는듯이 말했다.


 난 그 연수에서 1등 점수를 그는 흔들지 못했다. 하지만 뒤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같은 연수로 82점을 받아 입에 거품을 물던 영어과 모 선생은 다음 학기 중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다.

나보다  2살 연상인  그녀는 모 중학교 교장으로 빠르게 승진 했다.

 난 그 때 누군가의 조언이 생각났다.

"  근무만 잘하고, 1등하고 성적만 좋으면 뭐 합니까? 내처럼 양복 자켓에 이렇게 ..."

하면서 흰봉투를 늘 넣어 다닌다고 하던 기독교인 영어과 이 모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난 천성적으로 그렇게 아부를 못 하는 아버지의 딸이다.

장, 장학관의 명예에 욕심없다.

돈으로 하는 것은 매관매직 아닌가?


 혼탁한 학교 현실에서 이합집산하는 양태가 있어도 굳건히 흔들림없이  길을 걷기를  결심 하였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교포자였겠지만 난 그것을 욕망한 적이 없기에 교포자가 아니다.


난 스스로를 위안한다.

"부끄러운 길은 가지 않겠노라고 하물며, 교육자가"


선생이 가르치는 일보다  눈앞의 이익을 쫓아 아부해야 하는 감탄고토의 분위기 속에서  머리 굵은 고교생을 가르치면서  부끄러운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지도자가  덕이 모자라고  선비 정신이 결핍된 상태에서 사욕만 채우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 하다고 생각했고  미래의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 마음에서 도덕심과 수치심 교육을 더욱 강조했다.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선비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는 지식인의 길을 걷기로 했고

지난 세월은 그 지향을 위한 길에 서 있었다.


잘못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통찰하며 한낱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실천적 의지를 지니고 똘레랑스 실천의 위한 작은 걸음에 연암의 자유로운 사상은 나에게 자양분이 되어 피어날 것을

믿는다.


 연암이 말하기를 "길은 언덕과 물 위에 있다"고 했듯이, 특정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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