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때에 집에 있기는 더욱 덥고 짜증이 난다. 2층 양옥집 옥상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의 환경 요인에 의해 삶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무리 젊다고 하더라도 힘 빠지게 하는 일이다.
정주는 집안일로 대학원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느라 6개월의 시간이 다 흘러가 버렸다. 다행히 빠르게 회복되어서 스스로 위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거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유선배였다.
"뭐 해?"
"그냥 있어요. 집에"
"그럼 나와, 차 한잔 하게. D대학으로 와."
"네에."
정주는 유선배의 전화를 받고 샤워를 하였다. 요 며칠 진로에 대해 생각과 집안 상황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불만 덮어쓰고 한여름에 동면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블루 원피스를 입고 유선배를 만나러 나갔다. 유선배는 서울 D대에서 박사 학위를 하고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전임이었다.
유선배와의 약속 장소는 동문 중에 모 대학에 재직하는 권교수님 연구실이었다. 정주는 빈손으로 방문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대학 교내 매점에 들렀다.
그런데 방학이라 그런지 분위기는 썰렁했고 둘러보니
구입할 적당한 물건은 없고 거의 학생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주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좀 있었다. 정주는 택시를 타고 다시 내려와서 대학 정문 입구 아래의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딸기잼 롤카스텔라 두 세트를 포장하여 연구실로 향했다.
더운 한여름 걸어 올라가는 대학로 입구는 거의 행인이 없었다.
태양을 피해 어디든지 숨어버린 듯했다.
정주는 더위를 타지 않은 체질에 감사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연구실 입구에 도착했다.
권교수님은 지천명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다. 대학 동문 총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학교 행사에서는 몇 번 뵈었을 뿐, 직접 인사한 적은 없었다. 왜냐 하면 정주의 지도교수와는 다소 소원했기 때문이다.
권교수님 연구실에는 벌써 유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권교수님과 유선배는 정주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신 듯한 느낌이 들었고, 정주는 첫 대면이라 조금 조심스러웠다.
정주와 유선배의 인연은 지도교수 연구실에서 조교를 할 때에 당시 박사과정이던 유선배를 처음 만났고, 유선배가 정주에게 이우출판사의 전공책을 선물하기도 하고, 정주도 연구실로 방문 한 유선배를 극진히 대하였고, 언니가 없는 탓에 그 선배를 무척 따르면서 이내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 당시 유선배는 여러 곳의 출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마감 임박한 박사학위 제출 원고를 완성하지 못해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정주가 선배의 아파트에 일주일 넘게 입주하여 밤샘하면서 원고 필사를 완성하고 색인 작업까지 하여 마무리한 것 때문에 유선배는 자신의 학위 논문이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고 기간 안에 무사히 제출할 수 있었다.
정주의 그 수고로움에 감사하며 상당히 호의적이고 돈독해졌다.
그날은 유선배가 정주를 권교수님에게 소개하고 저녁을 사는 날이었다.
권교수님은 정주의 대학원 포기 사유와 진로에 대해 걱정을 하시며, 그 자리서 곧 서부교육청 중등과에 연락하셨다.
권교수님은 통화를 끓으시고는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하여 교육청에 오늘 오후까지 제출하라고 하셨다.
두 교수만 식사하기로 하고 정주는 서류를 준비해야 하여 연구실을 나왔다.
정주는 돌아와서 얼떨결에 지원서 및 졸업 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준비하여 작성하고 제출하였다.
당시 서부교육청 이장학사님은 해당 학교에 전화를 하였다. 그런 후 이장학사님은 " 내일 Y여중에서 교사를 급구하니 가서 면접을 봐라."는 것이다. 일이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정주는 일주일 전 교육고시를 준비하려고 서점에서 책을 사다 놓았다. "추천한다고 가야 하나? "라고 내적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정주는 고시가 1차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생각과, 또 자신을 지원해 줄 집안의 여력도 없음을 알았다. 4년 대학 기간에도 장학금과 신용보증
기금에 글씨를 쓰는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였다.
엄마에게 용돈을 요구하여 받은 적도 없고 책값을 달라고 할 마음도 없었다.
이런 생경한 자신의 현실적 문제를 감안한다면 이 추천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정주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상황이라 긴 고민을 하지 않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1980년도 중반의 사회는 민주와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어두운 시기였으나 좌절하지 않고 자유를 지켜야 하고 민주를 갈망하는 것처럼 우울했다.
정주도 대학원 포기로 실의에 차 있던 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진로에 대해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나름의 독립 속에 갈망과 우울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재주랄 것도 없는 재주 때문인지 아니면, 사심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했던 타인을 향한 일주일의 그 수고로움이 이렇게 단비로 변형되어 정주에게 온 것이다.
"이 단비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의 사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주는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자신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전락하지 않는 마음과 자세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지킨다면 중등 교육의 무대에 첫발을 내딛는 것도 자기 하기 나름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25일부터 Y여중에 3년간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관광버스 크기만 한 교직원 출근 버스를 타고 학교에 출근하여 정해진 일과에 맞게 열심히 가르치고 선배교사들에게 배우는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 당시는 자료의 전산화, 온라인 이런 용어는 아직 탄생하기 전이었기에 학교의 모든 업무는 모두 손으로 적어야 하고, 손으로 성적을 계산하여 산출해야 하는 정확을 요하는 업무들이 많았다.
학기말 성적 집계표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는 선생님들에게 빠르게 찾아 정확하게 맞추어 드리고, 정주의 글씨 쓰는 손은 다른 선생님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또 도움을 주어야 하는 데는 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 드렸다. 그래서인지 학교 생활은 업무상으로는 몸은 고달파도 순탄하였기에 매월 일정적으로 나오는 급료의 달콤함에 꿈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잊고 있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소속부서는 교무부였다. 그 당시의 모든 학교의 문서는 거의 교무부에서 해결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학생의 입학과 졸업 등 많은 행정적 업무를 해 내면서 근무 기간에 비해 학교 일의 전반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폐쇄적인 학교 교무실의 분위기는 갑갑하였다. 당시 발령을 같이 받은 또래 교사는 여덟 명이였다. 이들은 현상에 대한 분별과 정의가 살아 있었고, 기존 나이 든 남자 선생님들은 매우 고리타분하였다.
교무회의에서 획일적이고, 무조건 시킨 대로 하라는 식으로 나오면 그 당시 정주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젊음의 피가 뜨거워서일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과학과 양 선생하고 교무부 장하고 언쟁이 붙었다. 누가 봐도 양 선생이 옳았는데
교무부장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말 대꾸 한다며" 재떨이를 우리 쪽으로 집어던지는 것이었다.
모두가 놀랐다. 자기 앞으로 날아오지 않은 것에 안심을 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무슨 행동이지?'
아무리 군사정권 시대라 해도 학교 현장에서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일 이후 교무실은 노장파와 소장파로 분열되는 것 같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연령의 교사들의 눈치를 은근히 보게 되고 정주를 비롯한 햇병아리들은 영락없이 무례한 것들로 싸잡아 포장된 느낌이었다.
그날 그들은 일명 처총(처녀총각모임) 회를 결성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의 제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릇됨에 대한 올바름을 지향하는, 소수이지만 전원일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