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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준 Mar 10. 2024

76화. 장막

<흑마법서> 소설 연재

 혜성은 커다란 종이 위에 자신이 기억하는 하선의 등 문신을 자세히 그렸다. 그가 주문을 모두 적자 매려 왕실의 고대 마법 전문 마법사 36명이 그 종이를 가져가서 성 안의 넓은 응접실에 모여 태초함 소환 의식을 시작했다.


 한편 혜성과 여왕과 서점 직원들, 그리고 왕실의 마법사들이 서점으로 나가는 문 앞에서 대기하는 동안 이태민이 방금 만들어진 흑마법서를 가지고 왔다. 모두가 그 물건을 둘러싸고 구경했다.


 “와, 흑마법서가 이렇게 생겼구나.”


 여왕이 감탄했다.


 “정말 멋진데.”


 혜성이 보기에도 그것은 책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공예품에 가까웠다. 모든 마법서가 다 그랬지만 흑마법서 역시 두루마리 형태로 길이가 1미터, 지름이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기다란 막대 형태였다. 종이는 궁극의 구미호의 붉은색 꼬리털로 만들어졌지만 마력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검게 변해서 윤기가 흐르는 검은 비단 같았다. 또한 종이 겉에는 백금으로 만들어진 작고 납작한 조각이 두루마리를 묶고 있었는데, 조각 위에는 불사신 서점의 인장과 함께 책을 쓴 마법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김혜성’.


 혜성은 책을 들어 올렸다. 흑마법서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혜성은 침을 삼킨 뒤 두루마리를 잡아당겨 펼쳤다. 먹물처럼 검고 부드러운, 비단 같은 재질의 아주 얇은 종이가 펼쳐지면서 그 위에 빼곡한 은색의 마법 문자들이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옆에서 이태민이 중얼거렸다.


 혜성은 조용히 숨을 내쉬면서 두루마리의 끝을 놓았다. 그가 종이를 놓자 두루마리는 저절로 부드럽게 감겼다.


 “이제 드디어...... 무한히 위대한 궁극의 문학작품을 만들 수 있겠어.”


 “그동안 수고 많았어, 혜성아. 축하해.”


 여왕이 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걸 만들자마자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되다니.”


 혜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있던 김구름에게 물었다.


 “이사님, 정말 이걸 이용해서 인드라망을 장악해도 흑마법서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거 맞죠?”


 “물론이죠.”


 김구름은 웃으며 대답했다.


 “책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혜성은 한숨을 쉬면서 두 손으로 흑마법서를 살짝 쥐었다. 그는 종이의 서늘한 감촉에 몸을 살짝 떨었다.


 “잘 되겠지?”


 혜성이 여왕에게 물었다.


 “불안하니?”


 “응.”


 “네가 불안하다니 의외다. 넌 이것보다 더 큰 일도 많이 이겨냈잖아.”


 “이겨낸 게 아니야. 그냥 버틴 거지.”


 “그게 이겨낸 거지.”


 그때 왕실 마법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이제 거의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좋아요, 다들 서점으로 나갑시다.”


 여왕의 말에 혜성과 나머지 사람들은 성에서 서점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서점 앞에는 여전히 현무 44와 탱크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레이저포는 작동을 멈춘 상태였다. 군인들 뒤로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기웃거리고 있었다.


 조용한 서점 밖에서 갑자기 허공에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하는 빛과 함께 허공에 거대한 공중 함선이 나타났다.


 태초함이었다. 삼각형 모양의 함선은 서점 근처에 있는 빌딩들을 능가하는 크기였다.


 서점 앞에 있던 군인들은 갑자기 공중에 등장한 함선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갑자기 셀 수 없이 많은 꼬리가 달린 거대한 여우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여우 수백 명이 나타나 군인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혜성의 연락을 받고 온 고주월과 구미호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으로 둔갑한 상태로 구경꾼인 양 접근한 뒤 태초함이 나타난 순간 여우로 변해 뛰어든 것이었다.


 궁극의 구미호는 탱크와 군용 트럭을 뒤집어엎더니 몸통으로 거대한 레이저포를 힘껏 밀었다. 그러자 레이저포는 옆으로 한 바퀴 구르다가 옆에 있던 탱크를 깔아뭉개고 말았다. 레이저포를 뒤집어버린 거대한 구미호는 탱크를 뒤엎고 9만 개의 꼬리를 흔들어서 군인들과 차량을 날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작은 구미호들은 군인들을 물어뜯고 군인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녔다. 당황한 군인들이 총을 쏘려고 했으나 날쌘 구미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단단하게 잠겨 있던 서점의 유리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혜성과 여왕 일행이었다.


 군인들이 여우 때문에 혼비백산하는 틈을 타 그들은 서점 바로 앞에 떠 있는 함선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가까이 가자 함선이 땅으로 내려앉더니 문이 열리고 긴 계단이 내려왔다.


 “다들 서둘러요!”


 여왕이 외쳤다. 혜성과 세 직원, 그리고 여왕과 도깨비 마법사들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함선에 들어갔다.


 “이쪽으로!”


 여왕과 마법사들은 복잡한 실내를 달려 조종실로 들어갔다. 조종실은 이상한 기계장치들로 가득한 넓은 방이었다. 왕실 마법사들은 조종실에 들어간 즉시 기계장치들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함선의 계단이 올라오고 문이 닫히더니 태초함은 북쪽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군부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구미호들은 함선이 날아가자 재빨리 흩어졌다.


 태초함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강을 건넜다. 한강 근처에 인드라망 중앙 관리 발전소가 보였다. 함선은 발전소 바로 위 상공에 멈췄다.


 “폐하, 함선에 마력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함선을 조작하던 마법사 한 명이 말했다. 그러자 여왕이 혜성에게 말했다.


 “원래 태초함은 막대한 마력을 충전해야 움직일 수 있는 건데, 지금 매려를 연방에게 빼앗긴 상태라서 태초함을 충전할 수가 없어. 그래서 함선이 움직일 수 있는 제한시간이 짧은 상황이야.”


 그리고는 여왕은 모두에게 외쳤다.


 “다들 잘 들어요! 함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작전을 끝내야 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마법사가 외쳤다.


 “지금 연방 공군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더 서둘러야겠군. 자, 여러분, 이쪽으로.”


 여왕은 혜성과 세 직원들에게 이어 마이크를 준 뒤 조종실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열댓 명의 매려 군사들도 함께였다. 그들을 세워둔 뒤 여왕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상으로 내려갈 거야. 약간 어지러울 수도 있어.”


 그 직후 바닥이 열리더니 혜성 일행은 푸른빛에 싸여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땅에 도착했다.


 “사장님, 이쪽으로.”


 이태민이 앞장섰다. 그들은 발전소 안으로 들어갔다.


 발전소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함선이 나타나자 발전소 직원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거기서 아래로 내려가.”


 이어 마이크를 통해서 여왕의 목소리가 나왔다. 함선에 있는 여왕이 태초함의 초고대의 기술로 발전소 내부를 들여다보며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발전소에 있던 경비원들이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매려 군인들은 전기 총으로 경비원들을 가볍게 제압했다.


 혜성 일행은 여왕의 안내대로 발전소의 중심부로 가는 길을 찾아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단단한 문이 나타나자 군인들이 총으로 문의 고리를 부수고 열었다.


 마지막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그들은 마침내 발전소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다.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 연방의 인드라망의 심장부였다. 커다란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넓은 공간에는 수만 권의 고등급 마법서들이 공중에 뜬 채 가느다란 빛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책들 옆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군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동안 혜성과 직원들은 마법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태민과 박준식이 마법서 옆에 앉아서 가져온 노트북을 꺼냈다.


 “저희가 여기서 1단계 연결을 하고 있을게요. 사장님이랑 이사님은 내려가서 최종 연결을 하세요.”


 이태민의 말에 혜성과 김구름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이 발전소의 최하층이자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위층에 있는 수만 권의 마법서들을 연결한 마법의 빛이 이 방에서 모여 하나의 빛나는 커다란 구를 형성하고 있었다.


 “인드라망의 핵심 시스템과 흑마법서를 최종 연결하는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흑마법서를 발동시키세요.”


 “알겠습니다.”


 혜성은 들고 있던 흑마법서를 허공에 놓고 작동시켰다. 그러자 흑마법서가 허공에 뜨더니 저절로 펼쳐졌다. 방대한 주문이 적힌 흑마법서는 드넓은 방의 끝까지 닿았다. 혜성은 흑마법서 위에 손을 펼친 뒤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은색 글자들이 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다.


 “전 준비 됐어요!”


 혜성이 외쳤다.


 김구름이 빛나는 마법의 구 앞에 가서 손짓을 하자 허공에 붉은색 주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저도 준비 됐습니다. 이제 흑마법서를 연결시키세요.”


 혜성은 김구름의 말대로 흑마법서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펼쳐진 책의 마법 문자들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런데 그때였다.


 방의 저 쪽 끝에 있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달려왔다.


 “잠깐만, 잠깐만!”


 그 사람이 외쳤다.


 “뭐야?”


 혜성은 그쪽을 쳐다봤다.


 “김혜성!”


 혜성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사람이었다. 혜성은 달려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내 깨달았다. 그는 혜성의 약혼식 때 매려 궁전에 있는 혜성을 찾아와 불사신 서점과 계약을 한 연방의 자원부 국장 송태석이었다.


 “김혜성, 멈춰!”


 “귀찮은 일이 생겼군.”


 혜성은 책의 마력을 이용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송태석과 그 사이에 붉은빛이 나는 투명한 마법의 장막이 생겼다.


 송태석은 달려오다가 장막에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국장님, 오랜만입니다.”


 혜성이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근데 미안한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있다가 얘기하시죠.”


 송태석은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나서 장막을 손으로 마구 때렸다. 하지만 장막을 도저히 깨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닫자 송태석은 고함을 질렀다.


 “김혜성! 당장 멈춰!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거야?”


 “당연하지.”


 혜성이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겉으로는 평등과 정의를 말하면서 뒤로는 힘없는 사람들만을 희생시켜 왔지. 이제 당신들이 한번 희생해 봐.”


 “그만둬, 넌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저 시민견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그 말에 혜성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송태석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들어봐, 우리가 강민수를 찾아냈어. 그래서 강민수를 족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냈는데......”


 “족쳤다고? 그를 고문했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송태석이 외쳤다.


 “들어봐, 강민수가 그랬어. 자기가 김지훈의 친구였다고, 김지훈의 임종을 지켰다고 말이야.”


 “그건 나도 이미 알아.”


 “김지훈이 죽기 전에 그랬대. 자기 양아버지가 불사신 서점의 사장이었고, 하얀색 포메라니안 시민견이었다고!”


 송태석이 고함을 질렀다.


 “저 시민견이 김지훈의 아버지란 말이야! 넌 속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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